윤이상 기념관,2020년 2월의 여행
2020년 2월, 코로나 19의 위기가 코 앞에 닥쳐 있던 시점, 아직 마스크가 당연하지 않던 시기. 결혼기념일을 어찌 보낼까 고민하던 차에 아내가 통영으로 출장을 간단다. 금요일 오후에 출발해서 토요일에 돌아오는 일정. 토요일 오전에 내가 내려가 아내와 주말을 보내기로 했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통영은 늘 후회 없는 여행지이다. 잔잔한 남해 바다의 여유로운 아른함, 언덕 위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도시의 정겨움은 통영만의 매력이다.
통영의 매력 중 하나는 통영과 함께 기억되는 인물들이다. 통제영과 한산도에 남아 있는 이순신 장군의 흔적, 폭풍 같은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내며 소설로 기록해 낸 박경리 선생, 그리고 분단의 한가운데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조국을 그리다 독일에서 생을 마감한 윤이상 선생이 그들이다.
가람도서관 음악 전문 사서로 일하고 있는 아내에게 통영의 윤이상 기념관은 소소한 결혼기념일 선물이 될 듯했다. 일요일 첫 통영 여행 코스로 윤이상 기념관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마스크로 꽁꽁 싸매고 지내는 요즘, 통영 윤이상 기념관 사진으로 잠시나마 작년 이른 봄으로 돌아가 통영을 추억해 본다.
윤이상 기념관
주소 : 경상남도 통영시 중앙로 27 (도천동)
문의전화 : 055-644-1210, 644-1932
홈페이지 : https://www.utour.go.kr/01198/01203/01205.web?amode=view&idx=1689&
1917년 일본 제국주의 침탈이 극에 달하던 시기, 윤이상은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를 마친 뒤 오사카 음악학교에서 2년간 공부를 마쳤다.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며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수많은 학교의 교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윤이상 기념관은 그의 생가 터에 독일에서 살던 집을 재연하고, 유품과 사무집기, 가구, 생전에 연주하던 악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윤이상은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국제적인 음악가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정작 고국에서는 그를 간첩이라고 누명을 씌우고는 강제로 납치하여 사형을 선고해 버린다.
국제적인 구명운동 덕분에 정권은 2년 만에 형 집행정지로 윤이상을 풀어주지만 바로 독일로 추방해 버린다. 윤이상은 독일에서 음악활동을 하면서도 고국을 잊지 않고 늘 그리워했다. 5.18 광주 민주항쟁을 기리기 위해 <광주여 영원히>라는 교향시를 작곡했으며 1995년에는 민주화를 위해 분신자살한 청년들을 위해 <화염 속의 천사>라는 교향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끝내 윤이상은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1995년 베를린에서 영면에 들었고, 2018년이 되어서야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오게 된다. 윤이상의 묘소는 통영 국제음악당 바닷가 옆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위대한 음악가가 사용하던 오디오 장비 치고는 무척이나 소박하다. 특히나 왼쪽 가운데 샤프 미니 컴포넌트는 90년대 초반에 나온 제품으로 우리 부부의 신혼 시절 애용하던 시스템이다. 선생도 나름 얼리어댑터였던 것일까?
기념관을 나와서 통영시립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선생이 작곡했던 학교의 교가들이 보도블록 사이에 깔려 있다. 윤이상의 음악은 지금도 이 학교들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