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출사지 #14]
지난 일요일, [내가 사랑하는 출사지] 연재 #10편에 글을 썼던 파주삼릉을 다시 찾았습니다. 해마다 이맘때 가을이면 주말마다 찾아 가는 곳이지요. 일요일에는 마침 파주삼릉 중 하나인 공릉에서 예종의 세자비였던 장순왕후의 제사가 있어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왔습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좀 찍기는 했습니다만, 역시 가뭄 때문에 잎이 말라버려 화려한 단풍의 향연을 즐기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1년 중에도 서너 번씩은 꼭 찾아 가다 보니 이젠 단풍이 예쁘게 드는 나무들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올 가을은 가뭄 때문에 이미 잎을 떨구어 버린 녀석들이 많아 아쉬웠습니다. 몇 년 전에는 정말 찬란한 단풍을 자랑했던 녀석들인데 말이죠. 그래도 몇몇 단풍나무들은 그나마 고운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어 위안이 되는군요.
사진을 찍을 때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진에 담기는 것은 앵글 속에 있는 물체라고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사실은 물체에 반사된 빛을 필름이나 CCD에 기록하는 것이 사진이지요. 나무나 단풍잎을 찍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물체의 표면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혹은 투과하여 나오는 빛 알갱이(광자)들을 담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말이죠, 나무의 형태는 해가 바뀐 들 크게 달라지는 게 없어요. 그러니 한 번 가서 그 나무를 찍어 오면 다시 갈 이유가 없어지는 거죠. 작년이고 올해고 그 나무는 그 형태 그대로 그 자리에서 터를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헌데 사실은 하루 중 언제인지, 계절이 언제인지, 안개가 꼈는지, 구름이 꼈는지에 따라 빛의 상황은 수시로 달라집니다. 당연히 카메라 렌즈를 통해 담기게 되는 빛 알갱이의 상황도 천차만별이 되지요. 즉 같은 나무라고 해도 빛의 상태에 따라 사진은 제 각각의 사진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 같은 장소, 같은 물체라도 반사된 빛과 투과된 빛은 전혀 다른 사진을 만들어 냅니다. 시들어서 칙칙해진 나뭇잎이라도 빛이 좋은 상황에서 역광으로 투과된 빛을 이용하면 보석처럼 빛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결국 사진은 빛을 다루는 예술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지요. 피사체는 그야말로 피사체로서 사진의 일부분일 뿐, 빛을 읽는 사진가의 눈썰미와 좋은 빛을 찾아다니는 사진가의 발품으로 사진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쯤 되면 '멋진 사진 보고 혹해서 어렵게 찾아 갔는데 별 거 없더라.'는 여행객들의 투덜거림이 이해가 갈 만도 합니다. 사진을 모르는 분들은 사진에 담긴 빛을 보고 나서 그 물체가 멋진 것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이지요. 멋진 나무를 만나기 위해 수소문해서 그 곳을 찾지만 사진가가 만났던 빛을 다시 만나기란 쉽지 않죠. 이런 연유를 알 턱이 없는 친구들로부터 '사진은 다 뻥이야.' 혹은 '저건 포토샵빨이야.'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멋진 곳을 가야 한다.'는 말은 반만 맞는 말입니다. 멋진 곳에 가더라도 멋진 빛을 찾아내지 않으면 멋진 사진을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곳에서 멋진 빛을 찾는 것이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방법입니다. 자주 가서 그 곳의 피사체에 익숙해지는 것, 이름을 지어 주고 친구 삼는 것, 그리고 그 친구들이 가장 예쁘게 보이는 빛의 상태를 찾아 내는 것, 좋은 사진가가 되기 위한 사소한 노력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멋진 장소 100곳을 한 번 씩 찾아다니는 것보다 동네 공원을 100번 찾아가는 것이 사진 실력을 키우는데 훨씬 도움이 됩니다. 단 그냥 어슬렁 거리는 게 아니고 빛을 읽으려는 노력을 해야겠지요. 동네 공원에서 얼마 전에는 쪼끄만 애벌레였던 녀석이 어느새 성충이 되어 돌아다니는 걸 발견하고 반가워진다면 당신은 이제 사진가의 눈을 갖게 된 겁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