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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셩혜 Aug 26. 2020

태풍 ‘바비’ 속 귤나무를 보며 기운을 얻는다

태풍 ‘바비’가 제주에 가장 근접하는 8월 26일 항공편은 대부분 결항되었다. 이럴 것 같아 하루 일찍 서둘러 내려왔다. 이 시국에 여행은 아니고, 남편 출장길에 따라나섰다. 제주에 도착한 후 공항에서 협재까지 해안도로를 샅샅이 훑는데 풍경은 좋지만, 좁고 구불한 길 덕에 멀미가 날 정도이다.

날씨는 태풍 예보를 아는지 모르는지 쾌청하다. 여행객들이 너도나도 사진을 찍길래 무슨 일이 났나 싶다. 이유를 알고 보니 도두동 무지개 거리라고 SNS 핫스폿이란다. 5시가 되니 협재해수욕장 위로 먹구름이 점차 드리우기 시작한다. 남편 의지와 상관없이 오늘 업무를 마무리해야 한다. 비가 쏟아지면 사진 촬영을 할 수가 없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저녁 먹으러 나가는 길. 눈 깜짝할 사이 장대비가 쏟아진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흑돼지 집 한길정(광고 아님)은 한결같다. 육즙 가득한 오겹살 맛도, 오래된 인테리어도 여전하다. 오겹살에 소주는 필수다. 이곳은 제주도이니 한라산이 제격이다(넓은 홀에 손님은 우리 한 팀이고 운전은 술 마시지 않은 내가 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바람이 거세진다. 구름 무리와 초승달이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 밤하늘을 휘-이 휘-이 덮는다. 그 사이 번쩍. 번개도 내리친다.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바람의 결을 느끼기가 무서울 지경이다. 그 결을 따라 흩어지는 로즈마리 향이 코끝에 와 닿는다. 로즈마리 너머 귤밭. 비바람 속에도 귤나무에 영근 열매가 끄떡없다. 세찬 비바람에 하나쯤 툭하고 떨어질 법 한데 말이다. 아직은 푸릇푸릇한 풋귤의 모습이지만 씩씩하게, 굳건하게 비바람 참고 버텨낸다. 그러다 보면 볕의 기운 더해 주황 감귤로 탐스러움을 자랑할 날이 오겠지?

태풍으로 강제 휴가다. 외부 일정을 할 수가 없다. 바람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태풍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비바람이 휘-몰아친다. 바람에 맞서는 것이 힘들다. 몸이 절로 휘청거린다. 초속 36.4m이라는 강풍 앞에도 단단하게 주렁주렁 달린 열매 풍경이 2020년 여름, 가슴 깊이 떨어진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내 일이라지만(혹은 프리랜서 일이지만) 코로나 19로 생각이 많아진 요즘, 숙소 침대에 걸터앉아 보는 풍경에 뜻밖의 위로를 받는다. 검은 현무암으로 쌓은 담벼락 안 탐스런 귤나무 밭을 보며 기운을 얻는다. 단단한 열매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다 보면 감귤꽃처럼 화사한 날이 다시 오겠지.

<귤나무와 로즈마리 향이 함께 한 숙소는 서귀포 하원동 ‘제주토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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