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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셩혜 Apr 03. 2021

봄의 왈츠

일요일 낮, 예식장은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요즘은 주 4일 혹은 주 5일 근무제라 평일 저녁과 토요일에도 예식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대부분 일요일에 진행되었다. 아, 여기서 말하는 시기는 1993년쯤이다. 특히, 꽃피는 봄은 결혼 풍년이라 예식이 많았다. 요즘은 예식을 생략하는 경우도 있고 스몰웨딩, 셀프웨딩 같은 예식 문화가 등장했지만, 그때만 해도 지방은 판에 찍어내다시피 하는 결혼식이 대부분이었다. 예식 시작 십여 분 전 사회자가 장내를 정리하고 양가 혼주와 주례 착석 후 예식이 시작되면 양가 어머니 화촉점화부터 신랑‧신부 입장, 성혼 선언문 낭독, 주례사, 퇴장까지 15분이면 끝났다. 요즘 필수적으로 하는 축가와 케이크 커팅은 보기 드물었다.     

예식장을 운영하던 큰아버지는 무슨 속셈인지 고작 초등학교 6학년인 나에게 덜컥 피아노 반주 자리를 맡겼다. 덕분에 처음 한 아르바이트가 예식장 피아노 반주였고, 예식이 많아지는 봄날의 일요일이면 덩달아 나도 바빴다. 예식장 가는 날이면 초등학생티 내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운동화 대신 단화를 신고 바지 대신 원피스를 입었다. 할 수 있는 꾸밈이라곤 그게 전부라 티 내려 하지 않을수록 더 티 났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누구도 ‘몇 살이냐?’라고 물어보지도 않고 누구나 보이는 위치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최소한 예식장에서 불청객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처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다섯 살의 봄이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다녔던 곳이 피아노학원일 만큼 나는 피아노에 진심이었다. 그런 나에게 와이먼 <은파>, 슈베르트 <군대행진곡>, 바그너 <결혼행진곡>, 멘델스존 <축혼 행진곡> 곡을 연달아 연주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예식장 아르바이트를 제안받은 후 며칠은 학원 원장님과 집중해서 연습했다. 매년 봄 4~5월의 예식은 최소 두 건, 많은 날은 다섯 건까지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할 때 한 예식당 7,000원이었고 그만둘 때는 만 원을 받았다. 내가 당시 시급을 알 리는 없지만, 분명한 건 시급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았다는 점, 어린 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르바이트비는 예식이 끝나면 곧바로 경리 언니가 하얀 봉투에 넣어 건넸다. 봉투를 악보 사이에 껴 집으로 돌아갈 때면 시멘트로 된 길바닥에서 왈츠라도 추듯 사뿐사뿐 걸었다.      


가끔 그 봄날 가벼웠던 발걸음을 떠올려본다. 처음으로 좋아한 피아노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신기했던 소녀는 지금 없다. 매해 봄마다 그렇게 쳤던 그 연주는 이제 기억나지도 않고 피아노 치는 법도 다 잊었다.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없고, 좋아하지 않는 일도 참고할 수 있어야 돈을 버는 세상 속에 산다. 그때 공주처럼 보이던 새하얀 드레스 입은 신부가 진짜 공주가 아니라는 걸, 마냥 단란해 보이던 예식 속 많은 혼주와 가족은 어쩌면 잠시 연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바그너와 멘델스존처럼 생전 상극이던 두 사람의 곡이 한자리에서 연주되는 아이러니함도 이해하는, 결혼에 대한 환상보다 결혼 후 부딪힐 현실을 먼저 내다보는 그런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결혼식장에서 내 반주에 맞춰 행진하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수많은 커플의 봄은 그날의 봄처럼 여전히 감미로울까? 궁금해지는 2021년의 봄, 결혼을 앞둔 조카 커플은 오래전 예식장에서 만난 커플처럼 한껏 상기되었다. 푸르게 펼쳐진 잔디 위에서 알록달록 화관을 쓰고 왈츠라도 추는 듯 가벼워 보인다. 곧 있을 이들 결혼식장에 가면 피아노 반주자 자리를 유심히 살펴야겠다. 그때처럼 그 자리에 한 번 앉아도 봐야겠다. 피아노 건반을 따라 피어나는 추억의 선율 속에 있는 그 옛날의 나를 만나보고 싶은 봄이다.


2W매거진 10호 '봄의 이야기들'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2yjyj/222294839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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