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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셩혜 Jun 15. 2021

부귀영화 따윈 없지만 멈출 수가 없습니다

숲속을 걷다가 길을 잃었다. 분명 나무에 달린 리본을 따라 걸어간 길인데 어느 순간 리본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멈칫했다. ‘길이라면 리본이 있어야 하는데…’ 마지막 리본이 달린 나무 앞에서 한참 고민했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지만,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저-기 앞에 빛이 비친다. 빼곡한 나무 사이로 빛이 보이는 걸 보니 왠지 큰 길이 나올 것 같다. 작은 희망이 내다보인다. 앞에 보이는 빛까지만 쫓아보자 싶어 성큼성큼 움직여 보지만, 수북하게 쌓인 낙엽과 돌부리가 겹겹이 쌓인 숲길을 걷는 건 마음처럼 쉽지 않다. 손목 위 시계는 오후 5시를 향하고 있지만, 숲속 시계는 무섭게 어두워져 온다. 큰 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송전탑이 있다. 이렇다 할 방법이 없어 숲 관리 사무소로 전화를 건다. “거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 길인데… 다시 멍석 깔린 길까지 걸어 나와야 해요!”

무성한 초록 잎이 만들어낸 숲의 기운은 두려움이 되었다. 절기상 소만을 며칠 앞두고 있고 일몰도 오후 7시를 훌쩍 넘어가는 그래서 해가 길-어진 여름의 길목이지만,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내가 이 길을 얼마나 들어왔지?’ ‘나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 하는 생각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덤불 사이를 헤치고 나가다 느닷없이 구구-구구하고 우는 새 소리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여기저기 서려 있는 거미줄이 얼굴이며 옷에 닿는 느낌은 싫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어 얼굴에 붙은 거미줄을 손으로 쓰-윽 떼어 낸다.

며칠 전부터 예보된 ‘비’ 모양의 이모지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가와도 좋은 숲이라지만, 오지 않으면 더 좋으련만 결국 쏟아지는 장대비와 함께 숲을 걷는다. 몇만 원짜리 브랜드 우비는 몇천 원짜리 슈퍼마켓 우비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우중(雨中) 숲에서 가장 멀쩡한 사람은 슈퍼마켓 우비를 입은 친구였다. 브랜드 우비를 입은 나는 속옷까지 흠뻑 젖었고 머리카락은 제주 앞바다에 입수한 마냥 미역 줄기 같이 흐느적거렸다. 나한테서 멀쩡한 것은 고어텍스로 된 신발뿐이었다. 비는 중간중간 소강상태를 보이는 듯했지만, 바람이 불면 나뭇잎에서 우수수 빗방울이 떨어졌다. 물론 이런 날씨의 숲 코스 완주는 더 큰 성취감을 안겨준다. 동시에 777개의 나무 데크를 내려오면서 ‘비 오는 날 이 무슨 짓인가?’ 싶은 생각이 삼나무처럼 마음속에 쭉-쭉 뻗어나간 것도 사실이지만. ‘비 오는 날 분위기와 사진이 뭣이 그리 중요하다고 나는 또 기어이 비와 함께 숲을 걷는가?’하고 나지막이 혼잣소리 내며 빗물로 가득한 얼굴을 세수하듯 쓰-윽 닦아 낸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고 이 사달을 벌였을까?’ 싶은 후회가 때때로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며 이러고 있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가 하는 등 온갖 잡념이 마음속에서 얽히고설켜 덤불을 만들고 좀 잡을 수 없는 마음의 씨앗이 곳곳에 뿌려져 자리 잡는다. 뿌리 깊게 내린 나무처럼 마음에 자라난 온갖 굳은 다짐이 이리 흔들리고 저리 고꾸라지더라도 나는 잘 안다. 결국 이것도 내가 좋아 벌인 일이라는 걸. 애초에 가만히 있었더라면 시작되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또 가만있는 걸 참을 수 없어 일을 쳤다는 걸. 그게 내가 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여행 작가이니 숲에서 길도 잃어보고 같은 장소를 여러 번 찾아 볕도 쬐어보고 비도 눈도 맞아보고 여러 분위기를 경험하는 게 좋은 거름이 된다는 걸.


나는 숲에서 길을 잃고, 거센 비를 맞으며 발에 물집이 생겨 쓰리고 아팠지만 대신 한 뼘 자랐다. 숲에는 막다른 길도 있고 비와 함께 할 때는 자연에서도 천천히 해야 한다는 것, 물집이 몇 번씩 잡혔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면 점점 굳어진다는 것. 그렇게 여행은 나를 더 크게 한다. 여행 작가에게 부귀영화 따윈 없지만, 나는 여행을 그리고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이 글은 글 쓰는 여성들의 독립웹진 <2W 매거진> 12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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