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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셩혜 Jun 27. 2021

오랜만에 한껏 들떴다

코시국 이후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여행을 못 가서 어떻게?”였다. 여행 못 가는 것이 나한테만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여행을 못 가서 일도 줄고, 책도 안 팔리는 건 사실이다. 누굴 탓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러다 지난여름 친구이자 동료며 이웃사촌인 아미와 제주도 휴가를 떠났다. 숙소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넘겼고, 창밖으로 빗방울이 멈출 줄 몰랐다. 문득 이대로 계속 있을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 뭐라도 해볼까?” 아미는 바다를 좋아하고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그럼 우리 제주에 관한 책 한 번 해볼까!”

그렇게 출판사와 논의를 거쳐 출판 계약이 진행되었고 우리는 2주간 제주 출장에 나섰다. 우리 둘 다 일 년에 몇 번씩 제주 여행을 하지만, 이번에 난생처음 배를 이동 수단으로 선택했다. 5월 제주에 일주일 머물면서 이용한 렌터카 비용이 75만 원(아반떼)이었던 만큼 렌터카 비용이 어마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산-여수 6시간, 여수-제주 6시간을 걸려 12시간 만에 제주 도착! 여수에서 출발해 제주항에 도착하는 배 운항 시간은 새벽 1시 30분이다. 객실 예약을 해둔 터라 한숨 자다 제주항 도착 방송을 듣고 허겁지겁 일어났다(아침에 일어나 배 위에서 일출 보겠다는 생각은 숙면과 함께 사라짐). 6시간 탑승이 아쉽게 느껴지는 건 뭘까!

오랜만에 하는 취재 여행에 우리 둘 다 한껏 들떴다. 일주일은 김녕, 또 일주일은 애월에 머물면서 각자 일정을 소화했다. 아미는 나를 숲 입구에 내려 주고 자신이 취재해야 하는 바다로 이동해 취재한 후 다시 나를 데리러 왔다. 숲에 들어가면 기본 서-너 시간은 걸어야 하니 우리의 업무 소요 시간은 어느 정도 맞았다(그래도 아미가 왔다 갔다 하느라 힘들었을 테다).

출장에 동행이 있으면 참 좋다.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아미와 나는 각자 취재하고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하루를 나눴다. 잠들기 전 이튿날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함께 담고, 아침에 눈 뜨면 커튼을 열어 하늘 먼저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숲은 비가 내려도 비 오는 날 분위기를 사진에 담아낼 수 있지만, 바다 촬영은 날씨 영향을 많이 받기 마련이다.

제주에는 바다만큼 많은 숲길이 있다. 숲이란 곳은 입구와 출구가 다른 경우가 빈번하고 이 숲과 저 숲이 연결되기도 한다. 평소 자주 가는 비자림과 사려니숲길은 나무 수만큼 사람이 가득한 곳이라 배제하고 싶었지만, 제주의 상징과도 같은 숲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여행자의 접근이 쉬운 숲이 있는 반면 여행자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숨겨진 숲도 있다. 2주간 12곳의 숲길을 걷고 오르고 내리고, 또 내리고 오르고를 반복하며 ‘나는 왜 또 이러고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은 날 땀이 비가 오듯 흐르고, 비가 내려 우비를 입은 채 사진도 찍어야 하고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찝찝함을 만들어내니 뭐 자연스러운 생각 아닌가. 암튼, 내 넋두리에 아미는 남은 취재를 하며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권유했다. 숲을 다니다 보니 제주 숲의 모태가 되는 한라산이 궁금했다. 중학교 때 가족여행으로 가본 적 있지만, 성인이 된 후 방문해본 적은 없다.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이참에 다녀와 볼까 싶어 출장 말미에 다녀왔다. 성판악 코스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면서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도 찾았다.

2주간 일정을 소화하고 여수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려본다. 눈앞에 다도해해상국립공원과 거문도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하늘은 온통 잿빛 구름이지만 그래도 좋다.

이 풍경처럼 2주간 출장도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가끔 인물화 같기도 했고. 날이 좋든 흐리든 숲길 위에서 몸과 마음에 피톤치드를 무한히 충전했고 가끔 두려운 발걸음도 있었지만, 씩씩하게 헤쳐 나왔다. 노루를 동네 반려견처럼 만났고, 혼자 숲에 온 길동무에게 이것저것 내어주는 제주 삼춘도 만났다. 당일치기로 제주 여행에 나선 고등학교 동창, 십여 년 전 함께 일한 클라이언트와 급만남을 가지며 마음의 여유라는 사치도 부렸다. 진짜 혼자 들어가기 무서웠던 숲에 아미가 함께(물집 생겨 미안했지만)가 줘 큰 숙제를 해결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직 두세 번 더 제주 출장을 가야 하지만, 그때도 혼자는 못 갈 것 같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출장이 주는 즐거움을 이제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아, 그나저나 오랜만에 참 좋다!

 


2021년 6월 25일 오후 7시 42분. 제주-여수 한일골드스텔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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