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육개장 집은 아침부터 번잡스럽다. 제주에 오면 통과의례처럼 한 번은 들리는 곳이다. ‘아침이니 사람이 덜 붐비겠지?’ 하는 내 생각은 철저히 착각이다. 8시가 좀 지난 시간, 가게 앞이며 대기실이며 인파로 가득하다. 웬만하면 줄 서서 먹는 건 피하고 싶지만, 아. 이놈의 육개장이 뭐라고. 날 줄 서게 한다. 포장한다면 대기하지 않아도 되지만 언제라도 비를 뿌려댈 것 같은 먹구름과 습기 가득 머금은 날씨는 에어컨 바람이 아니면 이겨낼 수 없을 거 같아 결국 한 시간을 기다렸다. 다행이다. 이 기다림도 아미가 싫다고 하지 않아서. 아미는 이미 고사리육개장에 대한 내 진심을 알고 있다.
첫 끼로 고사리육개장을 먹으니 왠지 모르게 마음마저 든든해진다. 고사리육개장은 죽인데 국 같고, 국인데 죽 같은. 걸쭉한데 텁텁하지 않고 전혀 맛과 상관없는 비주얼이지만, 그 비주얼을 뛰어넘는 맛을 가진 제주 전통음식이자 향토음식이다. 제주 사람들이 많이 먹는 돼지 뼈로 국물을 내고 제주 지천으로 깔린 고사리를 잘게 찢어 넣어 푸-욱 고은 다음 척박한 제주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을 넣은 즉, 제주의 식재료가 한가득 담긴 끼니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끓여대는지 고사리는 소고기 같은 부드러운 미스테리한 맛을 자아낸다. 종종 지인들을 데려가는데 고기처럼 푹푹 찢어지는 것의 정체가 고사리라는 사실에 대부분 놀란다.
설문대할망이 만든 제주, 그 땅의 기운이 가득 담긴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숲에 들어가면 지천에 깔린 고사리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숲 입구나 주변 들판으로 고사리가 널렸기 때문이다. 종종 숲에서 나오는 이들 손에 들린 고사리 한 더미가 꽃다발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 재배는 불가하고 일일이 손으로 따서 말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주저하다가 또 맛있게 먹은 해장국을 생각하면(꼭 해장국이 아니더라도) 조금 꺾어볼까 싶기도 하다(아직 한 번도 꺾어 와 본 적은 없다). 제주 고사리는 줄기를 꺾어도 아홉 번까지 새순이 돋아난단다. 참 생명력 질기다. 제주 땅에서 쑥쑥 자라나는 고사리가 내 배속으로 들어와 나에게 또 다른 영양분이 되어 준다. 그 힘으로 뚜벅뚜벅 걷는다.
숲을 가기 전에 늘 왕복 거리와 소요 시간을 체크한다. 360여 개의 오름만큼은 아니지만, 숲도 많다. 흔히 관광객들이 찾는 숲은 비자림이나 사려니숲처럼 몇 군데 정해져 있지만, 꼭 그런 숲이 아니더라도 갈 만하고 가볼 만 한 숲은 많다.
어떤 숲이건 들어갈 때는 발걸음도 가볍고 콧노래도 흥얼거리게 된다. 입구 주변에 늘어선 것들에 오랜 시간 관심을 두기도 하고 별것 아닌 대상에게도 감탄한다. 매표소가 있는 경우 기분을 담은 한층 높은 목소리로 인사도 하고 나눠주는 숲 지도도 잘 챙긴다. ‘지도를 얼마나 참고하겠어!’ 싶지만,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 한 부 챙기는 걸 추천한다. 숲 입구에 있는 해충기피제도 뿌려주면 은근 효과를 볼 수 있다.
오늘은 얼마나 걷게 될지, 이 숲은 어떤 비밀을 갖고 있을지, 무슨 이야기를 담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걸음이다. 옅은 푸른빛으로 살랑살랑 흔들며 손짓하는 초입으로 들어서 걸음이 걸음을 재촉하듯 씩씩하게 움직여본다. 아! 정말 귀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니 마음도 함께 열어야 한다. 걸어 들어가면 갈수록 짙은 푸른빛의 무성함이 사위를 둘러싸고 자동차 소리 멀어지는 대신 적막함이 주위를 감싼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도 가끔 무섭게 들리고 꺄-악 꺄-악 처량하게 울어대는 까마귀 지저귐도 공포처럼 다가오지만, 별 거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안도의 한 숨을 내뱉는다. 그러고 나면 숨도, 걸음도 느려진다. 깊은 숨을 들이쉬며 저 멀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부터 내 몸으로 다가와 안기는 기분이다. 느려지는 걸음은 어쩌면 처음의 흥분을 차츰 가라앉히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까마득한 거리를 걸어 온 것처럼 느껴질 때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벤치 하나가 반가운 건 왜일까. 처음 찾아본 정보대로라면 이미 숲을 빠져나와야 할 시간인데 나는 아직도 숲에 있다. 올라가기 전에 알 수 없는 제주 오름이듯 들어가기 전에 알 수 없는 제주 숲이다.
안내된 소요 시간보다 걷기가 더 길어졌지만, 몸은 땀 범벅이 되고 꼴은 꾀죄죄해졌지만, 숲에 들어설 때와는 또 다른 마음으로 그 출발점을 빠져나온다. 도레미파‘솔’즈음 되는 톤으로 인사하며 들어간 그 길을 도레‘미’즘 되는 음계로 인사하며 벗어나지만, 마음만큼은 도레미파솔라시‘도’쯤 되는 듯 가뿐하고 뿌듯하다. 초입에 늘어선 끝이 동그랗게 말린 새순 달린 고사리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 안전하게 땅을 지키고 있다. 몇 시간 동안 누군가에게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다. 괜스레 내 마음이 다 놓인다.
*제주여행기, <제주는 숲과 바다>는 홍아미, 박성혜 작가가 교차로 주 1회 연재할 예정입니다. 무더운 여름을 나실 수 있게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글과 사진으로 보내드립니다. 많은 구독과 공감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