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푸른 바다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김녕 성세기 해변을 처음 봤을 때 무라카미류의 소설 제목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터라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꽤나 퇴폐적이었던 것만은 기억한다) 이 바다 빛깔을 나타내기에 그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으리라. 우리나라에 이런 바다 색깔이 존재할 수 있다니. 동남아 휴양지를 부러워할 일이 아니었어. 어쩌면 나는 이 황홀한 빛깔에 홀려 매년 제주 바다를 찾게 된 건지도 몰랐다.
왜 푸른 바다라고 하는 거야. 아무리 봐도 회색인데. 뭐가 상쾌하다는 거야. 비릿하고 불쾌한 냄새만 나는데. 인천에서 나고 자란 터라 아는 바다라곤 월미도 앞바다, 을왕리나 제부도의 갯벌 정도가 전부였던 내게 바다란 딱 이런 이미지였다. 물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에메랄드 빛 바다는 보라카이나 피피섬 같이 이름만 들어도 너무 멀고 외진 곳에 있는 판타지인 것만 같았다. 그러니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말로만 듣던 쪽빛 바다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감개무량했겠는가.
물론 제주도 바다라고 하여 모든 바다가 투명한 푸른색을 자랑하진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답게 제주도 동서남북에 걸쳐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바다가 20여 곳에 달한다. 그 중에서 우리가 흔히 ‘쪽빛바다’라 표현할 정도로 투명하고 푸른 수질을 자랑하는 곳은 주로 섬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함덕, 월정, 김녕, 세화 해수욕장이 대표적이다. 이들 바다라고 해서 사시사철 내내 눈부신 바다 빛깔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번 여행에서 제주도 해변을 모두 돌아본 결과 알게 된 것은 하나의 섬에 있는 해변임에도 바다 색깔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무엇이 바다의 색깔을 결정짓는가. 사실 바다 빛깔을 결정짓는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 번째는 모래 색깔이 밝은지 어두운지, 수심이 깊은지 얕은지에 따라 좌우된다. 녹조류나 해조류는 물론 먼지나 오염물질 같은 물속 부유물 등 지리 환경적 요소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색깔이 달라질 수 있다. 바닷속에 플랑크톤이 많으면 푸른빛을, 석회질이 섞일수록 초록빛을 띈다고 한다. 수온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서도 물빛은 달라진다.
그러나 바다 색깔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인은 뭐니 뭐니 해도 날씨다. 당연하겠지만 바닷물 자체는 파란색이 아니다. 투명한 소금물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 눈에 바닷물이 파랗게 보이는 건 순전히 빛의 산란 때문이다. 파장이 긴 빨강, 주황, 노랑은 그대로 흡수되고 말지만 비교적 파장이 짧은 초록, 파랑은 반사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당연히 볕이 쨍한 날일수록 반사시키는 파란색이 찬란할 수밖에. 물론 문과형 인간인 본인은 이 당연한 과학적 지식을 실제로 눈으로 경험하고 나서야 제대로 받아들였다.
빛이 적은 흐린 날씨엔, 아무래도 바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기가 힘들다. 물빛 예쁘기로 소문난 세화해수욕장에 갔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변 곳곳에는 보말도 잡고, 모래놀이도 하며 바다를 충분히 즐기는 피서객들로 흥겨운 분위기였다. 사실 흐린 날씨가 놀기에는 더 좋다. 하지만 나는 놀기보다는 촬영을 위해 방문한 터였다. 빛깔만이 그 바다의 매력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지만 좀 아쉬웠던 건 사실이다. 한참 촬영을 하다 보니 마스크 안으로 땀이 차오르고 어질어질 해서 잠시 쉬어갈 겸 카페에 들어가 구좌당근주스를 하나 주문했다. 비싼 만큼 신선하고 맛있었다. 제주바다 보며 제주당근주스를 마시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에너지가 빠르게 충전되는 것 같았다.
에이, 날씨가 좀 흐리면 어떤가. 반쯤은 체념한 채 기운을 조금 차리고 테라스에 나가 바다 사진을 몇 장 찍는데,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갑자기 이 해변가 전체에 누군가 필터를 씌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게 아닌가.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어서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시리도록 푸른 빛깔을 자랑하는 세화 바다가 방금 전 그 바다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구름을 비껴난 정오의 태양이 부린 마법이었다.
‘와, 사진 찍으라고 일부러 환하게 불 켜준 것 같네.’
땀도 식혔겠다, 서둘러 무거운 카메라를 챙겨 나온 나는 다시 해변을 되돌아가며 사진 촬영을 이어나갔다. 불과 10분 전만해도 흐릿하고 애매모호한 빛깔이었던 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짝반짝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깨끗한 수질과 적절한 수온, 하얀 모래와 얕은 해변, 거기에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니 마치 일부러 불을 밝힌 듯 푸른 바다가 짠 하고 빛나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당시에는 그 원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고 다만 이 아름다움이 지금 내 눈앞에 존재한다는 게 기뻤다. 그러니까 이렇게 파랗고 아름다운 바다는 꽤 많은 우연과 행운이 중첩되어 우리 앞에 펼쳐지는 기적이 아닌가. 푸른 바다 앞에서 우리가 한없이 기쁘고 설레는 까닭이 여기 있다.
- 넌 지금 자연의 기적을 몸소 경험하고 있는 거야.
익살스러운 스몰하트를 보내는 제주 돌하르방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찰칵. 사진을 찍고, 나 역시 제주에게 몰래 하트를 보냈다.
*제주여행기, <제주는 숲과 바다>는 홍아미, 박성혜 작가가 교차로 주 1회 연재할 예정입니다. 무더운 여름을 나실 수 있게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글과 사진으로 보내드립니다. 많은 구독과 공감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