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예보도 확인하지 않고 한남시험림이 오픈하는 날에 맞춰 방문 예약을 했다. 날씨와 상관없이 올해 첫 오프닝 날에 가고자 했던 욕심이 컸다. 날이 다가오기 전 날씨 예보 사이트 몇 곳을 기웃거린다. 간격을 두고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비 모양의 아이콘은 요지부동이다. 시간별 예상 강수량도 점점 짙어진다.
날씨가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비 내리지 않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숲 방문 날까지 이어졌다. 긍정의 바이러스는 숲 입구에서 체온 체크를 할 때까지도 변할 줄 몰랐다. 혹시 모르잖아. 숲을 걷는 동안 비가 멈출지도! 날씨 요정아, 나타나랍! 숲 걷기를 하는 동안 비가 멈추긴커녕 더 세차졌다. 일단 숲에 들어왔고 이대로 돌아가기엔 뭔가 진 기분이다. 어차피 우비까지 챙겨 입었으니 걷자. 걸어보자.
우비를 입어도 비가 얼굴로 몸으로 들이친다. 닦은들 무슨 소용이리오. 비가 멈추지 않는다면 다시 닥칠 것이 뻔한데. 찝찝해도 그냥 둔다. 바람까지 불어오니 우비가 나뭇가지마냥 펄럭인다. 펄럭이는 우비 자락만큼 내 마음도 나-폴 나-폴 가벼우면 좋으련만. 나무 데크 위로 조심조심 올라가니 뜻밖의 풍경이 펼쳐진다. 어-우. 안개가 자욱하다. 높고 푸른 숲을 둘러싼 안개는 비 오는 날 예상한 숲 풍경에 없던 장면인데. 꽁꽁 싸매 둔 카메라를 꺼낼 의욕조차 없어지게 만드는 이 풍경! 사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오름도, 제주 시내와 제주항도, 한라산도 안개에 갇혔다.
하필 비 오는데 사려니오름까지 올랐다. 왜 그랬을까? 무슨 오기가 생겨 비 오는 날 오름을 올랐을까. 끝없는 펼쳐지는 오르막을. 정상을 오르고 나면 다시 내려올 그 길을 뭐 한다고 또 오르고 있다. 공기 중 습기는 ‘어서 와 여긴 처음이지’하며 두 손 벌린 듯하다. 그 습기에 반쯤 절어 있는 상황. 오르고 오르다 체념해버리고 터덜터덜 걷는다. 정상에 올라가니 비바람이 좀 전보다 세차다. 우린 무엇을 바라고 올랐는가! 비바람에 이미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훗날 이런 날 추억이 더 오래 남는다며 일행끼리 서로를 위로한다. 멀동남오름과 삼나무전시림을 거쳐 사려니오름 정상에 기어이 섰다. 물 한 모금 삼키고 싶은데 거센 비바람 때문에 마음을 접는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구분되지 않는 손에 잡히지 않는 이 하얀 것을 수분 가득한 미스트라 생각하기엔 너무 분에 넘치는 양이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서둘러 내려가자.’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일행들과 함께 나무 계단을 미스코리아 자세로 내려온다. 사뿐사뿐. ‘이 계단 777개라는데, 끝은 나는 거겠지!’ 생각할 즈음 나타나는 7형제 삼나무! 하나의 뿌리에서 7개의 삼나무가 자란 아주 특이한 모습이 이 와중에도 시선을 잡는 걸 보면 신기하긴 한 모양이다. 근데 우리 왜 오고셍이(제주도 방언으로 ‘본래 그대로’라는 뜻) 오솔길 두고 계단 길을 선택한 거지? 의미 없는 질문과 함께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다. 먼저 내려온 일행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오늘의 걸음을 자축해본다.
비바람과 함께 사려니오름을 오르느라 고단했지만, 비 오는 날 사려니숲길은 참 좋은 여행지이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 날이라면 입구에서 입장 통제가 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전혀 문제없다.
다만 사려니숲길은 입구가 두 곳이라 목적에 맞게 잘 찾아가야 한다. 제주시 쪽 입구(비자림로 1112번 도로), 서귀포시 쪽 입구(남조로 1118번 도로, 붉은오름입구)로 나뉜다. 제주시 쪽 입구는 주차장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주차장 기준으로 숲까지 40분가량 걸어야 하고 서귀포시 쪽은 입구에 주차장이 있어 쉽게 접근 가능하다. 서귀포시 쪽인 사려니숲길 붉은오름 초입은 무장애나눔길로 나무 데크가 잘 조성되어 있어 휠체어 이용자, 어린이, 임산부도 숲을 즐기기 안성맞춤이다(빗물로 미끄러울 수 있으니 유의 필요). 나무 데크가 설치된 곳만 걸어도 좋고 숲으로 더 들어가 짙은 흙내음 속에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평지에다 오솔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비가 오는 날도 충분히 걷기 좋은 곳 중 하나이다(제주시 쪽 입구에서 서귀포시 쪽 입구로 트레킹을 한 날도 종일 비가 내렸지만, 코스를 완주하는 이들을 스무 명 가량 만났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숲을 걸으면 숲은 마치 보석마냥 반짝반짝거린다. 투명한 빗물이 나뭇잎에, 풀잎에 대롱대롱 매달려 그리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화산 송이로 이뤄진 흙길도 유난히 붉어 보인다. 피톤치드가 더 찐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비 오는 날 마시는 커피 한 잔만큼 찐하고 향긋하다. 안개에 쌓인 몽환적인 숲은 덤이다.
제주에 비가 내리면 ‘엉또폭포에 가야지.’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지 모른다. 하지만, 비 오는 제주 숲도 한 번 떠올려보면 어떨까? ‘비 와서 번거롭고 귀찮다.’라는 생각을 조금만 내려놓는다면, 생각지도 못한 정취가 남몰래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다닥 떨어지는 빗소리와 고요한 숲 속 새소리는 비 오는 날 길 위에 선 당신을 위로해주는 에너지가 되고, 잠자고 있던 감각을 깨워주는 자연의 연주곡이 되어 줄지도.
Tip. 제주 숲 여행을 한다면 가방에 우비나 작은 우산 하나 챙겨두는 것이 좋다.
*제주여행기, <제주는 숲과 바다>는 홍아미, 박성혜 작가가 교차로 주 1회 연재할 예정입니다. 산들바람과 함께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글과 사진으로 보내드립니다. 많은 구독과 공감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