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스토너(Stoner)》
집에 원목으로 된 스툴이 딸린 의자가 있다. 리클라이너는 아니지만, 모양은 같다. 아빠는 늘 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등 일상의 한 부분을 기댔다. 돌아가신 후 내가 생활하는 집 한편으로 옮겨와 우리 부부 일상과 함께한다. 20년 넘게 사용한 탓에 쿠션감은 내려앉았고, 생활감은 깊게 더해져 수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아빠의 부재가 희미해져 갈 만큼 그 의자도, 의자가 가진 의미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 이걸 고가의 비용을 들여 수리를 해야 할지 버려야 할지 몇 달째 답 없는 고민만 한다.
함께 읽고 싶은 인생 책도 마찬가지다. 며칠째 고민만 하다 결국 마감 날까지 오고야 말았다. ‘인생 책’이니 많은 책을 두고 고민한 건 아니지만, 딱 한 가지만 선택하는 게 뭘 먹을지 메뉴를 선택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 인생 책이라 부르는 책은 김정현 소설 《아버지》 오가와 요코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 존 윌리엄스 소설 《스토너(Stoner)》이다. 이 책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이 모두 남성이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한정수는 누군가의 아빠이자 남편이고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노수학자는 교통사고로 80분만 지속되는 기억력을 가진 천재 수학자이며 《스토너》의 윌리엄 스토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인물이다.
이 책 중 내가 나누고 싶은 책은 《스토너》다. 윌리엄 스토너의 청춘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삶을 다룬 것으로 ‘혹’할만한 사건도 ‘훅’할만한 특이한 구성도 없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삶의 궤적이 지속성을 가진 채 고스란히 이어진다.
스토너는 부모의 뜻에 따라 농과대학에 진학한다. 배움의 목적을 찾지 못한 채 무의미한 날을 보내다 셰익스피어 소설 한 편으로 영문학 졸업장을 받는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죄책감 속에 삶의 변화를 맞고 대학 강단에 서지만, 정교수가 되지 못했고 그렇다 할 제자도 없다. 사랑하는 여자와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지만, 그가 꿈꾼 생활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이상적인 삶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진 여인과 결혼생활은 불편하고 불안했으며 싸움과 인내의 연속이다. 그 싸움은 좋았던 부녀 사이마저 균열 지게 한다.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여인은 그의 일상에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지만 떳떳하지 못한 관계는 이별을 기약할 뿐이다. 이별을 삼긴 채 늙어가며 알코올 중독으로 무너지는 딸을 지켜보면서 암으로 부서지는 자신을 만난다. 이룬 것이 있다면 젊은 날 쓴 책 한 권.
성공한 사회생활을 누린 것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린 것도 아니다. 사회와 가정에서 영향력? 글쎄. 인생을 두고 말할 수 있는 ‘성공’이라는 건 어떤 문장에도 내비치지 않는다. 순간순간 행복이 찾아오지만, 삶의 공허와 무료 그리고 고독이 지배한다. 무미건조한 삶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스토너는 늘 자신이 마주한 현실에 순응한다. 그런 스토너 일생이 한 편의 플롯으로 완성된다.
가공된 인물이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순간이 모여 한 편의 이야기가, 또 한 사람의 인생이 되었지만, 스토너는 어쩌면 평범한 우리의 모습일 수도, 당신의 부모일 수도, 배우자일 수도, 자식일 수도 있다. 스토너는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까? 자신의 삶에 만족할까? 자신의 삶이 행복했다고 생각할까? 자신의 인생은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할까? 당신의 인생은 어떤가?
인생 책으로 《스토너》를 꼽는 이유는 짙은 여운이 마음에 멍하게 남아서만은 아니다. 누가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인생이 그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단하지 않아도, 보잘것없이 보여도, 따분함과 고단함의 연속인 삶일지라도 일상이 모여 만드는 모두의 인생은 각자에게는 유의미한 시간일 테다. 비록 지금은 체감할 수 없을지언정 말이다.
스토너는 나에게 존재의 의미에 대한 시선을 던졌고 ‘남을 함부로 평가해서 안 된다.’라는 인생의 자세를 상기시켰으며 일상의 지속성이 가진 아름다움이라는 해답을 제시했다. 아빠가 남기고 간 의자를 바라보는 익숙함, 반복된 하루가 주는 지루함, 씻을 수 없는 고단함, 평범한 일상에서 만끽하는 행복함 등 삶을 이루는 모든 순간이 배움의 과정이고 인생에 있어 숭고하고 찬란한 순간임을 잊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탄탄하고 높은 밀도의 문장으로 담아내는 스토너의 일생이 물밀 듯이 당신 가슴에 닿기를. 그리고 스토너처럼 우직하게 걸어가는 당신의 인생 속에 담긴 수많은 희로애락에 경의를 표한다. 스토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
- 《스토너(Stoner)》, 존 윌리엄스, 알에이치코리아, 2020, P.54
* 띠지 메시지에서 차용했음을 밝힘.
이 글은 2W매거진 16호(2021년 10월호) '같이 읽어요'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