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셩혜 Dec 26. 2021

김치처럼 잘 익은 사람이 되고 싶다

- 게스트에게 김치 담가주는 호스트

사진 한 장만으로 떠날 가치가 충분했던 곳, 고흥은 그런 곳이었다. 아니 더 적확히 표현하면 그 숙소는 사진 한 장으로 우리 부부를 고흥으로 이끌었고 그렇게 가느다란 인연의 끈을 잇게 되었다. 난생처음 가보는 고흥이었지만, 일말의 기대는 없었다. 그저 남편이 원하는 곳에서 며칠 쉬다 오는 딱 그런 휴가였다. 화려한 볼거리도, 흥미진진한 체험도, 다양한 먹거리도 없었다. 우리 부부를 이끈 숙소는 ‘나로도’에 있다. 숙소 앞으로는 동백도, 땅섬, 바래섬 같은 크고 작은 섬이 병풍처럼 있고 저 멀리 추도 너머 여수 바다가 보인다. 날씨 좋은 날은 일출과 쏟아지는 별을 감상할 수 있다. 시선이 닿는 곳곳에 올곧은 나무가 있고,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들고 나는 물결이 함께하는 곳이라는 걸 3박 4일 머물며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녀’도 함께 있다. 처음 보는, 아니 그저 나그네 같은 게스트 중 한 팀이었던 우리 부부에게 풍성하고 넉넉한 마음을 나눠준 호스트 그녀.   

  

캠핑 의자에 기대앉아 눈 앞에 펼쳐진 풍경으로 온 마음을 던졌다. 책, 휴대폰, 음악, 이야기 같은 걸리적대는 것은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풍경 앞에 남편과 나누는 대화도 사치였다. 정적만 가득했다. 바람결에 존재를 드러내는 잎사귀와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가 전부였다. 정적을 조심스레 깬 건 그녀였다. 건넛방을 청소하다 우리와 눈이 마주쳤고,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 대화가 지금의 글을 쓰게 한 시작점인 것은 분명하다. 대화는 이튿날 식사 초대로 이어졌고, 체크아웃하는 날 내 손에 그녀가 직접 담근 된장과 섞박지가 들려 있었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던 장소라 친구들과 가을 여행으로 한 번 더 찾았다.

     

“지난번에 섞박지 너무 맛있게 먹었습니다. 국물이 요구르튼 줄 알았어요.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밥에 싹싹 비벼 잘 먹었습니다.”     


정말 그랬다. 돈 주고도 살 수 없을 맛이었고, 국물은 유산균 덩어린 줄 착각할 정도였다. 색도 어찌나 고운지, 이런 섞박지를 언제 먹어봤나 싶었다.      


“맛있게 잘 먹었어요? 나 원래 손님들이랑은 잘 마주치지도 않고 이렇게 음식 해주는 일은 없는데. 그건 우리 남편도 알아요(긍정의 눈빛으로 호응해주는 사장님). 지금껏 서너 팀도 안 될 거야.”     


이번 여행에서는 더 큰마음을 받았다. 체크아웃 날 건네준 보자기에는 파김치, 열무김치, 배추김치가 켜켜이 싸 있었다. 담아둔 김치를 덜어준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왔다는 걸 알고 부랴부랴 장을 봐 담가 준 것. “김치를 담가 준다고!” 이게 가능한 일이냐며 친구들이 거들었다. “야, 김치 담가 주는 건 찐 사랑이야!”  

체크아웃 날 챙겨주신 김치 꾸러미

“시원한 맛을 좋아해요? 깊은 젓갈 맛을 좋아해요?” 괜찮다고 몇 번이나 고사했다. “진심으로 담아주고 싶다.”라는 그녀의 말에 감사하면서도 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왕 먹을 것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저 시원한 맛 좋아해요!”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궁금하다. 김치를 담가 주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니 말이다. 친정엄마도 김치를 사 먹기 시작한 후로 담가주지 않는다. 시댁 김치도 있지만, 젓갈 많이 넣는 강원도식 김치가 입에 맞을 리 없다. 그런 내 마음을 대신해 곁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지난번에 부부가 나란히 와서 나가지도 않고 자연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참 좋아 보였어요. 젊은 친구들이 자연을 즐기기 쉽지 않은데, 아침부터 밤까지 의자에 앉아 꼼짝도 안 하고 같은 곳만 보더라고. 내가 만들어 놓은 곳에 와서 이렇게 잘 즐겨주니 얼마나 고맙던지. 내가 만든 음식은 또 얼마나 잘 먹던지. 그때 밥 두 그릇 먹었었나? 불고기, 도토리묵, 오이김치를 싸-악 싹 다 비우는 게 예쁘더라고요. 우리 아들도 그렇게 안 먹는데….”     

있는 밥과 반찬에 수저 하나 더 놓고 끼니를 나누는 일도 사실 쉽지 않은 마음이거늘, 손수 김치를 담가준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몸 둘 바를 모르게 한다. 일면 일식도 없던, 그저 돈 몇 푼에 당신들이 잘 지어둔 공간에 며칠 머물다 가는 게스트일 뿐인데 말이다.      


은퇴 후 고흥으로 내려와 넓은 자연을 품고 사는 그녀 마음은 그곳 자연보다 더 넓었다. 강남에서 사모님 소리 들으며 살았지만, 자신이 잘 알아야 일도 잘 시킬 수 있다며 팔 걷어붙이고 음식도 하고 청소 대장으로 일했다는 이야기가 괜한 말은 아닌 듯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식사를 내어주는 모습, 밀대를 들고 숙소 곳곳을 청소하는 모습, 곡괭이를 들고 허드렛일하는 모습까지 어느 하나 어색함이 없다. “나는 지금 너무 즐겁고 행복해요. 그리고 청소 일에 자부심이 있어요. (잘 정리된 숙소를 바라보며) 이만하면 자부심 좀 느껴도 되죠?”     


겨울이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김치 나눔으로 사랑을 전하는 곳이 많다. 고흥에 있는 그녀가 담가준 김치는 그저 겨울나기 찬거리가 아니라 우리 부부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손난로 같다. 그녀가 좋아하는 가수 이문세의 노래처럼 이렇게 여행하며 만나는 인연을 통해 참 ‘알 수 없는 인생’이다 싶고 돈보다 귀한 게 있다는 걸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알게 된다. 누군가의 호의를 받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고 우리 부부는 그녀가 베푼 그 마음을 ‘잊지 말기로’ 하자며 김치를 먹을 때마다 마음에 새긴다.   

    

투숙 기간에도 아낌없이 나눠준 그녀의  마음

나도 그녀 나이가 되면, 그녀처럼 할 수 있을까? 마음이 향하는 이에게 정성을 담아 무엇인가 건넬 수 있고, 넉넉한 마음을 베풀 수 있는 그런 여유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때가 되어서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행복해할 수 있을까? ‘저렇게 살면 좋겠다.’ 싶은 모습이 그녀에게 있었다.    

 

자연 앞에서 삶의 속도를 가다듬으며 우리는 잘 비웠고, 또다시 잘 채웠다. 그 흔한 프랜차이즈 커피숍 하나도 없는 곳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게 김치 담가주는 그녀가 있으니 고흥은 특별한 곳이다. 그녀가 보여준 행동은 어쩌면 호스트로서의 친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친절도 마음 향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지금껏 여행하며 수많은 호스트를 만났지만, 내 미래를 그려보게 하는 이는 처음이다. 그녀처럼 나도 언젠가 누구에게 김치를 담가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런 잘 익은 사람이면 좋겠다.

가을 파가 맛있다고 파김치를 담궈 초겨울즈음 택배로 보내주셨다



 글은 2W매거진 18(2021 12월호) 기고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평범하지만 풍부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