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구름에 닿으면 이런 느낌일까. 구스의 털이 나를 잡아당긴다. 쓰-르르 내 머리를 포근하게 감싸는데 이미 이 베개에 점령당한 기분이다. 오랜만에 호캉스를 했다. 예약한 객실보다 두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객실을 받았다. 어차피 한 호텔이면 침구도 한 가지 종류일 텐데 괜히 객실이 더 좋아서 침구도 좋은 듯한 느낌이 든다.
가끔 호캉스나 여행 시 호텔 침구가 투숙객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비즈니스호텔부터 별 일곱 개짜리 호텔까지, 다양한 종류의 호텔이 있지만, 대부분 양질의 숙면을 누릴 수 있는 나름의 조건을 갖고 있다. 침구, 매트리스, 커튼, 향, 조명 등. 그래서일까 한때 호텔 침구가 크게 유행했다. 인기가 한풀 꺾였다고 하지만 명절 선물로 호텔 침구 세트가 판매되는 것 보면 수요가 있기 때문 아닐까. 선물로 침구 세트라니!
눈을 뜬 남편을 붙잡고 베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디서나 잠을 잘 자는 스타일이지만, 이 베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이미 내 마음을 읽은 모양이다. 판매 여부를 알아보라고 한다. 분명 본인 마음에도 쏙 들었던 모양이다. 본인은 한 수 더 떠 매트리스를 바꾸고 싶다고 넌지시 속내를 비친다. 나보다 한 수 더 위다. 근데, 베개 하나 바꾸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나, 매트리스와 침구만 바꾼다고 이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일단, 이 객실 크기만 20평이다. 대리석으로 장식되었고 내가 매일 청소한다고 해도 이 청결함을 유지할 수 없는 모양새다. 안방이 20평은 되어야 이 정도 크기의 침구가 세팅되어도 볼만할 테고 (일단, 우리 집 안방이 몇 평이지?) 암튼, 하나 바꾸기 시작하면 하나둘 다 바꿔야겠지.
나는 평소에도 베개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장기간 출장을 갈 때도 베개를 챙겨 다닐 정도다. 출장 전용 베개가 있는 것. 베개가 편해야 잠을 잘 잘 수 있고 몸이 편하고 그래야 컨디션 유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호텔 홈페이지를 열어 침구를 찾아본다. 침구 세트와 베개 가격이 모두 나와 있다. 침구 세트까지는 잘 모르겠고 베개는 탐이 난다. 곧, 추석인데 나에게 주는 선물로 한 번 질러볼까. 이 정도 가격이면 괜찮은데 괜찮은데 하며 브라우저를 닫는다.
생각하니 지금 사용하는 베개도 당시 꽤 거금을 주고 샀다. 벌써 10년 넘게 쓴 베개이기도 하다. 그때 가격과 지금 이 베개의 가격을 비교하며 자꾸 합리화시키고 있는 내가 보인다. 머지않아 이 호텔 베개가 우리 집으로 배달 될지도 모르겠다. 소비는 또 이렇게 조장된다. 매트리스는 사실 지금 사용하는 제품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바꾸기엔 아쉬운 게 사실이다. 언젠가 바꾸게 되면, 그때 호텔에서 사용하는 브랜드로 바꿔보지, 뭐.
이번 호캉스에서 호사를 누린 건, 내 머리인가보다. 체크아웃하고 호텔에서 나왔음에도 베개가 자꾸 생각난다. 베개의 편안함 때문일까, 호텔이 주는 안락함 때문일까. 베개 하나에서 시작되었지만, 자꾸 전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암튼, 베개는 위시리스트에 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