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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귀찮아졌다

by 셩혜
DSC00972.JPG 아그리젠토에서 묵은 에어비앤비의 온도는 따뜻했다

지중해의 푸르른 기운은 좀 전까지 머물던 팔라쪼 아드리아노와 달랐다. 시칠리아 남쪽을 향해 떠나는 길은 한겨울이지만 뜨거워 입고 있던 외투를 벗게 했다. 아그리젠토는 낯설었다. 모든 것이 낯선 여행지라지만, 그 ‘낯설다’라는 감정은 유독 더 크게 다가왔다. 전망 좋고 난방기가 쌩-쌩 돌아가는 에어비앤비 젊은 호스트의 환대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차가웠다. 도심 뒷골목을 걷다가 흑형들의 싸움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때 마주친 한 사내의 눈빛은 뒷걸음질 치게 했다. 여행에선 길을 잃는 게 또 하나의 재미인데, 그것마저 공포로 다가왔다. 끼니를 해결한 식당 직원이 계산을 잘못한 걸 알고는 문의를 하니,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오히려 내게 화를 내지 않나! 비옥한 땅에 지어진 그리스 문명의 잔재, 콘코르디아 신전(Temple of Concordia), 헤라 신전(Temple of Hera), 제우스 신전(Temple of Olympian Zeus) 등이 모인 신전의 계곡(Valley of the Temple)은 금빛 찬란함보다 오히려 잿빛 쓸쓸함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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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걸 체감하게 되는 순간은 의외로 많다.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보거나, 같은 사람을 만나지만 느끼는 감정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여행지에서 느끼는 모두의 감정이 같을 수 없다는 건 공명한 사실이다. 소설가 김영하의 시칠리아 이야기를 담은 <내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속 시칠리아와 일간지 기자, 여행 매거진 에디터들이 며칠간의 여행으로 쓴 이야기는 시칠리아에 대한 환상만 키웠다. 김영하 작가는 위 책에서 아그리젠토를 두고 “그리고 영화든 책이든 사람들의 주의를 단숨에 끌지 못하면 실패하고 만다. 결국 시칠리아 도시들 간 치열한 관광객 유치 경쟁은 압도적인 한 장의 이미지를 가진 아그리젠토의 승리로 귀결된다.”라고 표현했다. 그리스의 시인 핀다로스(Pindaros)는 ‘사람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대 도시’라고 칭송했다. 기자 및 에디터들도 ‘지중해의 심장’ ‘즐비한 유적’ ‘열정의 올리브’ 등 온갖 수식어로 여행지 시칠리아와 아그리젠토를 그렸다.

DSC01066.JPG 신들의 계곡에서 마주한 일몰

삭막하고 막막하기 그지없다고 느꼈던 아그리젠토가 누군가에겐 절대 잊을 수 없는 황홀한 여행지가 될 수도 있고 낯선 동양 사람을 동물원 원숭이처럼 바라보든 싸늘함과 내게 ‘마~담’하고 부르던 호텔 직원의 몸에 밴 서비스 정신이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던 팔레르모가 누군가에겐 따뜻함을 안겨 준 도시였을 수 있다. 누구의 의견이 맞는지 판가름할 순 없다. 세상의 여행에서 정답이란 없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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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아팠다. 컨디션도 난조다. 한국에서 챙겨 온 감기약도 다 떨어진 데다 새로운 감기 증상이 나타나 여행지에서 약국을 가보는 경험도 했다. 도시에 대한 느낌도 컨디션도 이렇다 보니 여행이 귀찮아졌다. ‘아직 며칠이나 더 남았지?’하고 달력을 보고 ‘여긴 나와 맞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칠리아에서 시간은 참 느리게 흐른다. ‘언제 이 여행을 마치지 하고?’ 생각할 정도로 더디다. 시칠리아를 떠날 때쯤이면 생각이 바뀔 수 있을까. 로마로 들어가면 또 달라질까. 일상을 지내다 보면 이 순간이 다시 떠오를까? 하. 여행이 즐겁지 않기는 또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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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속 거대한 그리스,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 유적이 잘 보존된 공간으로 들어왔다지만 신전만 두고 말하기엔 아쉽고, 열정의 땅 시칠리아라는 데, 나의 열정은 아..... 쩝 찾을 수 없다. 그저 분명한 건 내가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음이다.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시로코’ 바람이 불고 은행나무 대신 올리브와 아몬드 나무가 즐비하고. 사람 키보다 더 큰 알로에 나무가 나를 감싸 안을 것 같고 여기 약간 더 보태자면 음산한 골목에서 불쑥 흑형이 나타나고, 하얀색 키톤(Chiton)을 걸치고 유유히 걸어오는 여신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법한 그런 곳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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