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카드 부치다
유럽에서 배달되는 크리스마스 카드라! 혼자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관광지 사진이 담긴 기념엽서를 사지 않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찾겠다고 몇 번이나 문구점에 갔지만, 내가 원하는 크리스마스 카드는 많지 않았다. 이탈리아 여행 첫 도시였던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는 카드를 살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두 번째 여행지였던 팔라조 아드리아노. 깡촌 중 깡촌이라, 문구점 따위는 없을 거야 하고 포기했는데 산책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여긴 뭐 하는 곳이지?’ 하고 문을 열었다. 문구점과 복권 판매를 함께 하는 곳이다. ‘차오’하고 주인 부자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출입문 뒤, 그토록 찾던 카드 진열대가 있다. 하지만, 생일이나 어머니날 축하 카드가 대부분이고 크리스마스 카드로 보이는 건 전혀 없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비슷한 맥락을 가진 카드 두 종류가 있어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니 ‘소중한 너에게’ 뭐 그런 뜻이란다. 카드 표지에는 포도주를 담는 성찬 도구가 그려져 있다.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 마을이 주는 정다움과 비슷하기도 하고 한국에서 크리스마스 전에 카드를 받아 보려면 이때쯤에는 보내야겠다는 마음에 몇 장 샀다. 카드를 사고 나오며 남편과 “이 집주인이 이렇게 많은 카드를 산 사람이 처음이라 놀랄 수도 있겠다.” “디자인이 올드 한데 혹시 갔다 둔 지 한 몇 년쯤 지난 카드 아닐까?”하는 우스갯소리도 했지만, 이런 카드라도 누군가 받으면 기분 좋을 것 같다는 마음이 앞섰다. 다섯 장의 카드를 샀지만 보면 볼수록 촌스럽기 그지없어 결국 주인을 찾은 건 단 두 장뿐이다.
거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우체국이었다. 여느 도시마다 우체국을 검색해봤지만, 생각만큼 많지 않았고 게다가 운영 시간이 대부분 1-2시가 마감에 늘 사람으로 만원이다. 때문에 몇 번을 우체국 문 앞까지 가고도 포기를 했다. 아그리젠토를 거쳐 네 번째 여행지 시라쿠사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꼭 보내리라 다짐하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우체국에 12시 20분쯤 도착했다. 6개의 창구가 있는 큰 우체국이었지만, 운영되는 창구는 ‘1’ 번 창구 하나였다. 번호표를 뽑아야 하는 시스템인 것 같아 입구에 대기 중이던 한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영어를 못 한다고 했지만, 내가 손에 든 카드를 보여주니 기계에서 표를 대신 뽑아줬다(나중에 보니 신부님이다).
신부님의 도움으로 순서를 기다렸다. 전광판에서 안내하는 번호는 60번 대였지만, 내 손에 들려진 번호표는 98번. 아. 카드 한 장 보내는 게 이렇게 어려워! 그래도 꼭 보내겠다고 다짐했으니 좀 기다려보기로 했다. 4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 가운데 두 자리가 남았다. 우리 부부 양옆으로 현지인 여성이 앉았다. 눈치를 보니 이 사람들도 ‘대기 시간이 왜 이렇게 기냐?’, ‘왜 창구를 하나밖에 열지 않았나?’하고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그러다 우리 왼쪽에 앉은 여자가 자신의 번호표를 오른쪽 끝에 앉은 여자에게 전달했고, 그 여자는 다시 자신의 표를 내게 건넸다. 그녀가 준 번호표는 내가 가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앞 번호였다. 뒤이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뽑은 번호표는 110번 대까지 늘었고, 새로 온 사람들까지 합세해 민원이 들끓는 듯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30분 정도 지났나. 기다리다 지쳐 옆에 앉은 여자에게 물었다. “너네 나라는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니?”하고. “원래 그렇지 않은 데 오늘은 좀”하며 말끝을 흐렸다. 내가 느끼기엔 원래 이런 것 같았다.(다른 도시의 우체국에서도 상황은 비슷했으니) 계속해서 전광판은 1번 창구만 깜빡거렸고 휴대폰 속 시계는 오후 1시를 넘어가고 있다. 그러다 옆에 있던 여자가 갑자기 내 손에 들린 카드를 가리키며 “너 이거 보낼 거면 노란 박스에서 해도 돼”라고 했다. “뭐라고!” 그러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타바키(Tabacchi)나 기념품 판매숍에 가면 노란색 우편 박스가 있다는 것. 그곳에서 엽서를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여행 중 몇 번이나 그 박스를 본 적이 있다. 근데 왜 난 한 번도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암튼 새로운 정보를 얻었지만, 지금까지 우체국에서 기다린 것이 아까워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는 순서가 되어 창구로 갔고 그 자리에 새로 앉은 할머니에게 내가 뽑은 90번 대 번호표를 드렸다.
조식 후 감기약을 먹고 나온 남편은 약에 취했는지 우체국에서 30분가량 쪽잠을 잤고 그러는 사이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다. “한국으로 보내고 싶어요”라는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직원은 우편물을 저울에 올려 요금을 체크했다. 크리스마스 카드의 무게는 15~17g이었다. 무게 체크 후 기계에 넣으니 우표 대신 세 가지 종류의 도장이 찍혀 나왔고, 국제 수화물로 분류되었다. 그렇게 우체국에서 카드를 보내고 나온 시간은 오후 1시 34분.
우체국은 1시 35분이면 문을 닫는다. 내가 나올 때 우체국에 남아 있던 사람은 족히 8-10명은 되었다. 카드 한 장 보내겠다고 들어간 우체국에서 모든 것이 ‘빨리빨리’인 한국 시스템이 떠올랐다. 언젠가 오늘을 떠올리며 이야기하는 날이 오겠지. ‘네가 받은 그 카드 한 장 보내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며’ 말이다. 이탈리아 우체국의 일 처리 속도는 매우 느렸고 나는 기다림에 지쳐갔지만, 한국에서 카드를 받아보며 행복해할 가족과 지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았다.
Tip. 여행을 마치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휴양지였던 타오르미나의 우체국은 오후 8시까지 운영했고, 바티칸 내 우체국은 일요일 날도 영업했다. 그녀가 알려준 노란 박스는 우표 값이 3유로, 우체국에서 붙일 때 2.4~2.5유로보다 조금 더 비쌀뿐더러 스탬프가 찍히는 아날로그적인 매력은 찾을 수 없었다. 시라쿠사에서 1차로 다섯 명에게 카드를 보낸 후 로마와 피렌체를 거쳐 마지막 피사에서 보낸 카드까지 모두 열두 명에게 이탈리아로부터 온 카드를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