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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조끼 입은 백발 노장이 주는 위안

by 셩혜

점심으로 먹은 홍합에 문제가 있었는지, 늦은 오후부터 배가 심상치 않다. 가지고 있던 진통제 한 알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숙소는 시라쿠사의 구시가지인 오르티지아 섬(Ortygia Island), 지중해를 전망으로 가진 방이었지만, 내 컨디션으로 이런 해안선 풍광이 감탄을 자아낼 리 없다.

시라쿠사 숙소, 호텔 헨리 하우스(Henrys House) 룸에서 펼쳐지는 뷰

몸에서 약 기운을 쉽게 알아채지 못했는지 배는 점점 심하게 아파왔다. 똑바로 누워있을 수가 없던 내 몸은 점점 한 마리 새우가 되어 간다. 하늘이 새까맣게 변하는 듯했고 이후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신이 들었을 때쯤 나는 혼자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놔. 더 심하게 아프면 안 되는데’, ‘옆에 있는 남자에게 감당하기 힘든 숙제를 줄 텐데’ 싶었다. 급한 상황에 ‘툭’하고 튀어나오는 생존 영어가 유일한 남편이 아픈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상황을 설명할 일은 만무하다. 그러니 나는 아프면 안 되는 것. 다행히 몇 시간 자고 나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통증은 사라졌고 고요함으로 무장한 밤바다의 평화로움이 마치 내 몸을 대신하는 것 같다.


여행 9일 차. 컨디션 난조라 몸도 마음도 무겁다. 뭘 하나 봐도 즐겁지 않고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이런 내 반응에 적지 않게 당황한 남편이 한마디 거든다. “다음부턴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만 여행 가야겠어.”하고. 맞다. 사실 시칠리아는 남편 때문에 왔고 처음부터 일말의 기대라곤 하나도 없었다. ‘남편이 좋으면 그걸로 됐어.’라고 위안해보지만, 마음과 달리 몸 상태를 숨길 수 없다. 호텔에서 뭉그적거리다 밤공기라도 쐬어 보자 싶어 가져온 외투를 몇 겹씩 껴입고 길을 나섰다.

아레투사의 샘(Fonte Aretusa)

아레투사의 샘을 지나 골목을 통해 펼쳐지는 풍경이 낮과 또 다르다. 낮 동안 그리스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며 뛰어다녔을법한 시라쿠사 대성당 앞 광장은 밤이 되니 말레나가 거니는 듯 그녀의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하고 들리는 거 같다(<말레나>는 2001년 개봉한 영화로 모니카 벨루치가 주인공 ‘말레나’ 역을 맡았다). 성당, 시청이며 할 것 없이 중세 건물에 은은한 조명이 더해지니 한층 더 기품 있어졌다. 시라쿠사 대성당 앞 광장의 새하얀 바닥은 유독 더 반짝인다. 남편은 이 바닥이 마음에 드는 듯 한국에도 이런 종류의 타일로 광장 바닥을 했으면 좋겠단다.

시라쿠사 대성당과 광장(Duomo di Sirecusa, Piazza Duomo)

광장을 지나 몇 걸음 걷지 않아 발걸음을 멈췄다.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가 즐비한 골목, 그 사이에 우두커니 불 밝힌 곳. 그 안에는 백발의 노장 두 명이 앉아서 바느질하고 있다. 투명한 유리문으로 보이는 그들 모습에 한참 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매장 앞을 지나는 수많은 여행객이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그들은 문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도통 관심이 없다. 그저 묵묵히 일과를 수행 중이다. 수선만 하는 곳 같진 않고, 천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걸 보니 양복 맞춤 제작을 하는 모양이다. 한쪽 벽에는 상장이 한두 장 걸렸고, 나머지 벽에는 유명인과 찍은 사진 몇 장이 이들을 말해준다. 남편이 “안 가?”하며 재촉했지만 양장점 앞에서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잠깐만”하며 남편을 붙잡았다. 그들 중 한 노장이 빨간색 털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그 조끼가 공간을 난로처럼 데우는 듯하다. 그 기운이 얼마나 강한지 마치 링거 한 대 맞은 느낌이다.

남편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기분이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얼굴에 생기가 띄기 시작했고, 알 수 없는 기운과 무얼 좀 해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겨났다. 펍에 앉아 웃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인파 속 소리가 소음이 아닌 멜로디처럼 들렸다. 아폴로 사원까지 산책을 마치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길, 혹시나 싶어 양장점이 있던 골목으로 돌아왔지만 문이 굳게 닫혔다. 내일 다시 이 앞을 지나야겠다. 아니 시라쿠사를 떠날 때까지 양장점 앞을 계속 지나야겠다고 다짐한다.

이튿날 양장점 앞길로 갔다. 빨간 조끼 노장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나머지 노장 홀로 바느질 중이다. 그 모습을 잠시 훔치다 일정에 나섰다. 시라쿠사 시장, 시라쿠사 고고학 공원, 마돈나 성당을 돌아본 후, 호텔로 오는 길, 이번에 보니 양장점에 손님이 있다. 두 노장은 보이질 않는다. ‘어디 가셨나?’하며 살펴보니 빨간 조끼 노장이 구석에 있는 오래된 재봉틀 앞에 앉아 페달을 밟고 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자리다. 내가 그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동안 의자에 걸터앉은 손님이 힐끗 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잘 보이지도 않는 빨간 조끼 노장의 모습을 가까스로 담으며 마음의 기운을 충전한다. 그다음 날도 조식 후 후다닥 양장점 앞을 훔치러 다녀왔다.

고고학 공원(Parco Archeologico della Neapolis) 내 로마 원형 극장

고대인들에게 붉은색은 질병과 화를 막아주고 주술적인 힘을 가진 색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그리스가 이탈리아 땅에 세운 최초의 도시, 시라쿠사에서 만난 빨간 조끼 입은 백발 노장은 마치 신화 속에서 걸어 나온 인물 같다. 온기를 주는 색과 닮아서 그런 것인지, 누군가 ‘호호’ 불며 발라주던 빨간약이 떠올라서인지, 그 빨간 조끼 입은 백발 노장의 모습에서 받은 알 수 없는 위안은 남은 여행의 봄볕 같은 따스한 기운으로 내게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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