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터카를 이용해 타오르미나(Taormina)에 가서 하루를 보냈다. 시칠리아에는 유럽 최대 화산인 에트나 산(Mount Etna)이 있는데 카타니아(Catanina)-타오르미나 간 고속도로에서 그 모습을 보며 달릴 수 있다. 이번 일정에서 에트나 산 투어는 제외했기에 고속도로에서 마주한 것이 전부이지만 산 정상부는 유독 잿빛처럼 보였다. 타오르미나를 향할 때도, 다시 카타니아로 돌아올 때도 에트나 산은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어둡고 무거웠다. 그 산이 눈부실 만큼 깨끗한 모습을 자랑한 건 우리가 시칠리아를 떠나던 날이다. 카타니아 공항 어디에서든 에트나 산을 볼 수 있는데, 마치 두 팔 벌려 기다리는 엄마의 품처럼 카타니아를 찾는 이를 반기고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덩그러니 지켜보며 자식을 배웅하는 엄마의 모습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듯 보였다.
로마에서 시칠리아 팔레르모 공항으로 들어와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건 카타니아 공항을 이용했다. 2주간의 시칠리아 여행이 끝났다. 그동안 여행 하며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 기분이다. 하루하루가 일 년처럼 힘들고 고단했다. 시칠리아에 있던 나는 우여곡절의 연속인 것 같았다. 이탈리아로 출발하는 날까지 원고 마감을 하는 등 일에 치여 워낙 피곤한 상태로 출발하기도 했지만, 여행 가면 없던 힘도 생기는 내게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두 발로 길을 내딛는 게 아니라 마치 도살장에서 끌려가는 한 마리 동물의 걸음 같았다. 혹시 몰라 한국에서부터 챙겨 간 감기약은 다 떨어졌고, 그대로 버틸 수가 없어 약국을 두 번이나 갔다. 영어-이탈리아를 혼용해가며 약사와 소통했고 2주 내내 약을 달고 살았다.
한 시간 이십여 분을 날아 로마로 왔다. 고작 한 시간 조금 더 날아온 것뿐인데 로마의 하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카타니아에서 출발할 때는 청명한 날씨 덕에 삼일 만에 처음으로 선명하고 깨끗한 에트나 산을 봤는데, 로마는 비가 내렸다. 시계는 오후 2~3시를 가리켰지만, 하늘은 마치 오후 5~6시 같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공항에서 나온 사람들은 어디론가 서둘러 뛰었다. 지하철역, 버스 정류장, 공항 앞 호텔 등으로 목적지는 모두 달랐지만 무척이나 분주해 보였다. 비가 내리다 보니 날도 춥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고 숙소가 있는 나보나 광장으로 이동하는 길. 글루밍 한 런던의 날씨가 떠올랐고, 남편과 나는 한 시간 이십 분 전 마주했던 날씨가 그립다는 대화를 나눴다.
도로에 차량이 줄지어 섰다. 비까지 오니 한참 밀리는 것 같다. 미터기에 요금이 올라가는 건 개의치 않았다. 몸 편하겠다고 선택한 이동수단이었고, 다른 교통편보다 비싸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택시는 시내에 들어와서도 좁디좁은 골목길을 하염없이 달렸다(이때부터 로마에서 어떻게 운전해야 하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숙소는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을 따뜻하게 품은 곳이다. 아파트먼트 홈페이지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근사한 풍경을 자랑했다. 몇 백 년쯤 된 로마 건물에서 수동으로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낯선 경험도 했다. 새하얀 내부 인테리어는 고풍스러운 외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심지어 아파트먼트 1층은 옛 유적이 발견되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체크인 후 객실에 비치된 아이패드와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틀었다. 시즌이 시즌이니만큼 고민하지 않고 선곡은 크리스마스 캐럴! 거실 겸 주방과 침실에 있는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나보나 광장,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 잔뜩 머금었고 공기는 무겁다.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수백 마리의 새무리는 이곳을 더 음산하게 했지만, 유럽의 어느 광장에서든 새가 빠지면 섭섭할 일이다.
나보나 광장의 넵튠 분수, 오벨리스크, 회전목마, 폰타나 델 로모가 일렬로 광장에 찾아온 손님을 반겼다. 객실이 있는 3층에서 내려다보니 가지각색의 군중들이 제멋대로 광장을 즐기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군밤을 사고, 분수를 돌고, 간이 공연을 보고,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고 인형 뽑기 등의 게임을 한다. 날씨는 유쾌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만은 쾌청하다. 고대 로마 황제 경기장으로부터 시작해 중세기 동안 민중들의 축제와 행사의 장이 되고, 대중들이 즐겁게 삶을 즐겼던 이 공간은 수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지난날 그 생동감 넘치는 모습과 기운을 간직한 모양이다.
시칠리아에서만 마시고 살 수 있다는 아몬드 와인 한 병을 로마까지 챙겨 왔다. 몸의 기운이 감정에 절로 반응하는 듯 와인을 따지 않을 수 없었다. 시칠리아보다 날씨도 더 춥고, 비까지 내리는 데 왜? 왜 이렇게 들뜨는 건 지 알 수 없다. ‘만약, 로마 여행을 한 후 시칠리아로 떠났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중요한 것은 로마에 오니 컨디션이 살아나는 것 같다는 점이다. 흘러나오는 캐럴에 맞춰 절로 춤추는 나를 보며 남편이 거든다. “그래! 이제 너 같다.” 여행지 오면 없던 힘도 생기는 게 나였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로마는 아니, 로마에 있는 나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 나보나 광장에 있는 회전목마 백마에 탄 왕자님 호위를 받으며 예쁘게 꾸며진 마차를 타고 행진에 나서는 공주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