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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에서 천국을 보다

by 셩혜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지인들이 토스카나 지역을 방문한다면 농가민박에서 하룻밤과 이른 아침 산책은 필수라 했다. 올리브 나무, 포도나무, 사이프러스 나무가 드넓은 초원 사이 주인인 듯 자리하고, 그 위로 운해가 펼쳐지는 장면은 몽환적인 그림과도 같다는 것. 여행자의 경험담을 통해 추측해보면 토스카나의 이른 아침은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풍경화 한 점이다. 자연이 주는 편안함과 아늑함, 그리고 신비함이 거기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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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엔차에 있는 농가민박(아그리투리스모)에서 하룻밤은 생각보다 좋았다. 난방시설을 잘 갖추고 있어 12월 중순임에도 웬만한 호텔보다 따뜻했고 침구는 양탄자처럼 보드라웠다. 오래된 벽돌집은 안정감에 포근함까지 더해졌다. 눈을 떠 주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커튼을 살짝 열었다. 뾰족한 창살 사이로 불그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경험자의 조언대로 아침 산책에 나서기 위해 서둘러 채비를 했다. 오전 7시를 몇 분 앞둔 시간. 주차해둔 자동차 앞 유리는 서리로 가득했고, 자동차 안은 스산하기 그지없다. 하품하니 입김이 절로 뿜어졌다.


핸들을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겨져 마음이 내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구릉과 구릉이 얼마나 많은 능선을 이루고 있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조선 시대에 금강산을 담은 화가가 많다면 이탈리아 화가들은 모두 이곳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할 정도로 손꼽히는 절경이다. 여행 시기가 겨울이라 푸르른 초원을 볼 수 없을 거라 여겼지만, 기대 이상으로 풍요로운 모습은 한겨울이 주는 선물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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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하늘은 구름이 뒤덮었다. 구름과 구름이 맞닿은 곳 뒤로 능선과 능선이 숨바꼭질하고,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모를 붉은 기운은 구름에 천연염색이라도 하는 듯 물들이고 있다. 스르르 뽐내는 아침 햇살의 뜨거운 기운에 눈을 뜨기가 힘들다. 능선을 따라 일렬로 서 있는 나뭇잎에 볕이 스며드는지 눈 한쪽을 찡그리고서도 반짝거리는 윤기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절정의 평화로움도, 사진으로 담기에 역부족인 발도르차 평원이지만 이른 아침 달콤한 잠과 맞바꾼 풍경치고는 만족스러웠다. 고백하건대 나오기 전 창문 밖을 내다보니 하늘에 낀 구름이 많아 ‘안 예쁘겠는걸. 나가지 말고 그냥 잘까?’하고 내적 고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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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후 짐을 꾸려 다시 길을 나섰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지만 146번 국도와 60번 국도를 선택했다. 롤러코스터 같은 길의 연속이지만 토스카나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니 선택이 아닌 필수다. 국도 중간중간 이름 모를 작은 마을은 평온하기 이를 데가 없다. 차량 통행도 잦지 않아 천천히 주행하더라도 누구 하나 클랙슨을 울리지 않는다. 구릉 따라 펼쳐진 포도나무는 줄기가 삐쩍 말라비틀어져 황량하기 짝이 없고 제멋대로 자란 올리브 나무가 흐드러진 풍경은 쓸쓸해 보인다. 일렬로 선 올리브 나무 끝에 있는 작은 집 한 채가 그 쓸쓸함을 덜어주려는 듯 묵묵히 그 곁을 지킨다.

목가적인 토스카나의 풍경을 보고 있으니 사진을 취미로 하던 아빠가 생각났다. 드넓게 펼쳐진 초록의 평온 위로 유년의 기억이 내려앉았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어린 소녀 뒤로 그 소녀를 지키는 젊은 아빠의 모습이 환영처럼 그려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혹시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여기 어딘가에 아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쳤지만, 결국 남편에게 들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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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그림 같은 낯선 풍경 앞에 목메는 상황을 이겨보고자 시답지 않은 농담을 건넨다. ‘만약에 말이야 아담과 이브가 여기 있었다면 사과를 깨문 것이 아니라 올리브를 먹다가 일이 났겠지?’ 그렇게 60번 도로를 빠진 차는 시에나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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