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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행이다. 호텔이 따뜻해서.

by 셩혜

크리스마스이브다. 피렌체에서 기차를 타고 피사에 다녀오기로 했다. 언제부터 비가 내렸는지 인도에는 빗물이 가득 고였다. 피사 출발 전 먼저 사흘간의 지긋지긋한 추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드디어 에어비앤비 체크 아웃, 호텔 체크인하는 날이다. 멈출 줄 모르는 비를 맞으며 캐리어를 끌고 움직이는 게 아무래도 무리일 듯해 1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10유로 택시비를 쓰고 5분 만에 움직였다.

호텔에 미리 체크인한 후 캐리어를 맡겼다. 비가 멈출 것 같지 않아 우산 하나를 빌려 산타마리아노벨라 역으로 향했다. 역은 듣던 대로 넓었다. 무인 기계를 찾느라 헤맬 만큼 넓다. 플랫폼이 열 개가 넘는다. 피사행은 2번 플랫폼에서 출발한다는 안내를 받았는데 플랫폼이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다 직원에게 물었다. 1~3번 플랫폼은 메인 플랫폼 안쪽에 있단다(그러니 안 보일 수밖에). 직원 안내에 따라 움직이니 이미 기차가 선로에 대기 중이다. 좌석이 지정되지 않은 등급의 기차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이 탑승해 있다. 빈 좌석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탑승객은 줄줄이 몰려들었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두고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지, 아니면 휴가를 가는지 그 목적을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의 얼굴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밝히는 불처럼 반짝거렸다.

기차는 역을 빠져나갔다. 하늘은 점점 짙은 회색빛으로 어두워지고 차창의 빗방울 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 ‘비가 멈출까? 계속 내려도 할 수 없지 뭐!’하고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눈다. 나와 남편은 나란히 앉았고 출발 직전 가족이 맞은편 좌석에 짐을 풀었다. 두 살 된 옴브렐라와 그의 가족이다. 아이는 수줍은 듯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봤고, 우리는 눈이 방울만 하게 크고 눈썹이 긴 아이를 예쁘다며 바라봤다. 기차가 피사를 향해 달리면 달릴수록 비는 거세졌고, 아이의 애교는 절정에 다 달았다. 손을 맞잡고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간식도 내어주고 한국식 장난에도 까르르 거리며 반달 눈웃음을 뽐냈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피사 중앙역(Pisa Central Station) 플랫폼에 진입했다. 먹구름은 여전했지만 다행히 비는 그쳤다. 피사에는 중앙역과 산 로소레역(S.Rossore) 두 개의 역이 있다. 피사의 사탑과 가까운 역은 산 로소레역이지만, 환승을 해야 한다. 중앙역에서 하차할 경우 20분을 걸어야 하지만, 환승할 시간을 생각하면 도긴개긴이다.


중앙역에 내려 도심을 거닐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도심에 펼쳐졌다. 이번 여행을 하며 지겹도록 본 마켓 풍경인데 발걸음은 또다시 느려진다. 정겹고 볼 것 많은 풍경 덕분에 중앙역에서 내리길 잘했다며 우리 선택을 칭찬했다. 강을 건너고 피사대학교를 지나 피사의 사탑에 도착. 피사 도심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는 현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축배를 들었고, 피사의 사탑에서는 여행객들이 모여 탑으로 축배를 드는 것 마냥 사진 찍느라 정신없다. 탑을 보는 위치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 보이는 이 현상을 분석이라도 하려는 걸까 자세와 위치를 바꿔가며 사진 찍기 여념 없는 여행객의 모습은 또 하나의 볼거리다. 이런 풍경이 무뎌진 이탈리아 군인과 경찰은 탑을 지키기에 여념 없다. 탑 주변으로 두오모와 박물관이 있지만 유독 탑에만 여행객이 집중된다. 이탈리아 각지에 두오모(Duomo, 대성당)가 차고 넘치지만 이렇게 외면받는 두오모는 또 없으리라.

다시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 역을 거쳐 숙소로 돌아오는 길, 그 많던 구름은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자, 이제 정말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다. 호텔 입구에 놓인 트리는 저녁이 되니 불을 밝혀 밤거리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크리스마스를 보낼 호텔은 이번 여행 중 가장 좋은 숙소이다. 기본 룸을 예약했지만 업그레이드를 해 준건지 예약한 룸보다 훨씬 좋은 뷰를 가진 곳으로 배정받았다. 테라스도 있고 그 앞으로는 베키오 다리 아래 아르노강이 엽서 속 장면처럼 은은하게 흐른다. 풍경도 풍경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추위에 몸을 떨지도, 숙소에서 패딩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따뜻함이 이리 큰 선물이 될 줄이야! 정말 다행이다. 호텔이 따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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