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첫 숙소는 무척 춥다. 숙소에 있어도 한기가 들 정도이다. 예상대로 숙소보다 숙소 밖이 더 따뜻했다. 너무 추운 탓에 숙소에서 모닝커피 따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다행히 숙소 앞은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피렌체를 찾는 누구라도 한 번은 방문한다는 카페 진리(Gilli)가 있다. 매일 아침, 코스처럼 진리를 찾아 에스프레소와 빵 한 조각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랜다. 출근 도장 찍는 것처럼 매일 방문한 덕분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방법을 터득했고(현지인들은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생수로 입을 헹궈낸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훈남 바리스타들이 내려주는 향긋한 커피로 하루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두오모 뷰 때문에 선택한 숙소였지만 위치는 꽤 좋았다. 도보로 3분 거리에 두오모, 산 조반니 성당, 조토의 종탑이 있고 10분 내 베키오궁, 우피치·아카데미 미술관 등 주요 관광지가 있다. 발길 닿는 곳곳엔 버스킹 하는 이들과 크리스마스 장식이 넘쳐났고,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온화한 기운과 해가 지면 하나둘 켜지는 반짝이는 불빛은 마음마저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다.
사실, 피렌체에 도착한 다음 날 두오모 쿠폴라 관람을 예약했으나 과감히 포기했다. 일몰 시간을 고려해 예약했고, 해당 시간에 입장해야만 하는 데 그 시간을 놓아버린 것. 놓친 것도 아니고 자발적인 선택으로 포기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비가 내렸고 바람까지 불었다. 쿠폴라에 올라간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기대했던 뷰를 볼 수 없다는 건 직감처럼 알 수 있었다. 숙소가 있던 4층에서 봐도 이미 하늘은 먹구름 가득하다. 게다가 컨디션까지 난조였다. 결국 가장 따뜻한 패딩을 입고 숙소에서 하염없이 쿠폴라만 바라봤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피렌체이지만, ‘그때 다시 올라가지 뭐!’ 하는 쿨-한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두오모 쿠폴라를 눈앞에 두고도 올라가지 않았지만, 후회 따윈 전혀 일도 없었다. 그렇게 미적미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어차피 저녁도 먹어야 하니 조금 일찍 숙소에서 나와 단테 박물관에 갔다. 단테에 큰 관심 없을 남편이고 피렌체가 낳은 위인이야 차고 넘치지만 숙소 옆이니 한 번쯤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는데). 단테의 생가이기도 한 박물관은 그에 관한 기록뿐만 아니라 당시 피렌체 지역의 가문과 정치적인 상황, 무기 등에 대해서도 전시하고 있다. 남편은 단테의 신곡, 그가 사용하던 책상이나 환경보다 지역 가문에 더 관심을 보였다. 가문의 깃발을 정리해둔 곳에서 전시물을 살펴보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한국에서 왔어?”라고 묻는다. 그 남자는 우리 대화를 듣고 단번에 한국어라는 걸 알아챘다.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동양인에게 ‘일본에서 왔냐?’고 묻는데 바로 한국이라고 말해주는 게 고마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어를 어떻게 알지?’하는 의문이 생겼다.
우리에게 반가움을 표시한 그는 이것저것 한참이나 물었고, 결국 통성명을 나눴다. 하와이에서 20여 년 서핑을 타다 현재는 친퀘테레에 사는 대니(Danny). 대니는 친구들과 함께 여행 중이었지만, 자신의 친구는 뒷전이고 우리에게 더 집중했다. 한국 드라마에 관심이 많다는 대니는 쉼 없이 자신이 본 드라마에 관해 설명했다. 그러던 중 “가장 최근에 본 드라마는 뭐야?”라는 내 질문에 서슴지 않고 “공항 드라마”라고 대답했다. 뭐? 공항 드라마라고! 내심 놀랬다. 놀란 마음 진정시키고 “혹시 주인공이 장애인이었어? 남자 주인공이 핸섬하지? 인천공항 많이 나오는 그 드라마 말하는 거야?”라는 폭풍 같은 내 질문에 긍정의 대답을 이어갔다.
‘오 마이 갓!’ 혼잣말처럼 내뱉었지만 대니가 듣고서 꺄우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남편을 가리키며 “그 드라마 이 사람이 만든 거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대니는 남편에게 “너 배우야?”라고 물었지만, 대니, 내 남편이 배우처럼 생기진 않았잖아! 나는 남편의 직업(로케이션 디렉터)에 관해 설명했고, 그 드라마의 한국 제목을 말하며 인터넷에서 <여우각시별> 포스터를 찾아 넌지시 보여줬다. 포스터와 몇몇 이미지를 본 대니는 자신이 본 드라마가 맞는다며 맞장구쳤다. 드라마는 남편이 디렉터 한 작품이고, 드라마를 마치고 이탈리아로 휴가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토끼처럼 눈이 커진 대니는 크게 웃으며 남편의 손을 맞잡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대니는 남편과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내게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고 이듬해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며 꼭 다시 만나자고 했다. 결국 연락처까지 주고받았다. 남편은 멋쩍은 듯 웃었지만, 내심 뿌듯해하는 눈치다. 해외까지 나와서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인데, 이렇게 남편 드라마를 본 사람을 만나다니! 옆에 있던 남편이 갑자기 두오모 쿠폴라처럼 크고 높아 보인다.
그나저나 피렌체까지 가서 두오모 쿠폴라에 올라가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살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더 가겠지. 그때 가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