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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크리스마스는 틀리지 않았다

by 셩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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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 온 지 6일째. 오랜만에 따뜻하게 숙면을 했다. 그리고 맞이한 크리스마스는 무척이나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이다. 어젯밤 달이 유난히 밝았고 별도 선명하더니 이러려고 그랬나 싶다. 숙소는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다. 글로벌 호텔 브랜드처럼 객실이 많은 대형 호텔이 아니라 조용하고 차분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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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후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갔다. 두오모 쿠폴라는 포기할지언정 천주교 신자로 크리스마스 미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호텔 컨시어지에서 시간을 잘못 알려준 바람에 십 여분 늦었지만 운 좋게 제단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라 제단도 넓다. 제단 위 미사를 진행하는 신부만 5명이고 제단 앞쪽으로 경호원이 7명이다. 삼엄한 경계 태세를 갖춘 이들이 크리스마스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지만, 이유는 있었다. 주교와 추기경이 미사에 참석한 것. 평 사제가 아니라는 건 복장에서 알 수 있었다. 천주교에서는 주교는 자주색, 추기경은 진홍색의 수단을 입는다. 또한 ‘미트라’라는 뾰족한 관은 예식을 주관하는 주교가 쓰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어로 진행되는 미사를 이해하긴 역부족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축복을 누리기에 언어는 큰 장벽이 되지 못했다.


미사 후 성당 앞 조토의 종탑에 올랐다. 414개의 계단을 오르는 게 쉽진 않았지만, 두오모 쿠폴라도 포기한 마당에 이것마저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몇 번이나 쉬어 가며 올랐지만, 정상부에 도착해서도 헉헉거리는 숨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다. 가쁜 숨을 다독인 건 눈 앞에 펼쳐진 피렌체 풍경이다. 청명한 하늘에 붉은 지붕은 유난히 더 선명해 보인다. 풍경이 곧 그림같이 펼쳐진다. 두오모 쿠폴라 다음으로 높은 건물답게 사방이 시원하다. 종탑에 오르니 눈앞에 두오모 쿠폴라가 아른거린다. 팔을 쭉-하고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깝게 있는데, ‘아, 저곳을 포기했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종탑에 올랐으니 이렇게 피렌체의 상징과도 같은 두오모 쿠폴라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쿠폴라에 올랐다면 이렇게 바라보지 못했겠지! 보이는 풍경은 비슷하지만, 기분은 남달랐을까. 영화 한 편으로 로맨틱함의 대명사가 된 두오모 쿠폴라는 조토의 종탑과 다른 느낌을 줄 수 있을까! 일단 두오모를 오르지 않았으니 지금 당장 비교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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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답게 온 거리가 행복으로 넘쳐 보였다. 레플리카 광장 회전목마 속 작은 말은 힘차게 내달리는 듯했고, 그 말을 탄 어린 소년은 마치 왕자처럼 보였다.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는 예술혼을 불태웠고, 버스킹에 나선 음악가는 흥겨운 캐럴 연주로 분위기를 북돋웠다. 우리 발걸음을 베키오 다리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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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날 피렌체를 거닐며 다니는 것이 마치 꿈만 같다. 꿈같은 기분에 취해 다리에 기대 쉬었다. 그러던 중 들리는 반가운 한국어. 패키지여행팀이 때마침 시야에 들어왔고 남자 가이드의 목소리가 꽤 인상적이어서 눈길이 갔다. 테너 같은 중저음의 굵은 목소리가 낯설지 않아 ‘목소리 어디에서 들어봤는데’ 싶어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피렌체에서 크리스마스날 지인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근데 심상치 않다. ‘혹시 저기... ’ 하고 물었다가 아니면 ‘죄송합니다’ 사과할 각오로 인사를 건넸다. 그 가이드는 놀랍다는 듯 “맞죠? 성혜 씨! 맞네. 설마 했는데.” 세상에 크리스마스날 피렌체에서 지인을 만나다니! 그것도 한 수업에서 고작 다섯 번 본 것이 전부인 사람을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만난 것이 너무 신기하다며 박장대소하며 함께 사진을 찍고 담소를 나누다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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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스레를 떨며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다. 좋은 날 올라가려고 미뤄뒀는데 날씨도 크리스마스인 걸 아는 모양이다. 피렌체에 온 이후로 가장 투명한 날씨다. 이런 날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미켈란젤로 언덕도 인파로 가득하다. 피렌체 하늘과 땅, 그리고 우리 마음에 일몰이 아름답게 물든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한참 넋을 놓았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꼭 크리스마스 선물 같다. 가장 화려하게 꽃 피운 그 시절이 수백 년의 시간을 관통해 물결처럼 다가오는 듯하다. 피렌체는 낭만의 도시라더니 일몰은 그 수식어가 왜 붙었는지 유감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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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날 산타할아버지는 착한 일을 한 아이에게 선물을 준다고 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든 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면서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 있다. 가령 징글벨이 울리는 크리스마스날 피렌체에서 지인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꽃이 만개한 후 아름답게 저무는 것처럼 피렌체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 그 하루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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