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3박 4일은 물 흐르듯 빨랐다. 애초 계획은 2박이었는데 그랬다면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 베네치아가 던진 잔잔한 마음의 물결은 나를 다시 이곳으로 부를 것 같아 떠나는 날 아쉬움이 덜했다. 물 위로 배만 다니는 줄 알았던 도심을 살짝 빠져나오니 몇 대의 버스가 보였다. 로마광장이다. ‘아~ 딱 여기까지만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거구나!’하며 두리번두리번 렌터카 사무실을 찾았다.
이번 여행 중 세 차례 렌터카를 했는데 가장 좋은 브랜드의 차로 배정받았다. 볼보 세단을 타고 기분 좋게 이탈리아 북쪽을 향해 출발한다. 목적지는 꼬모 호수 인근에 있는 ‘레코’라는 마을이다. 물의 기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야에서 사라졌고 고속도로 양 옆으로 포도밭이 즐비했다. 지지대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포도가 탐스럽게 영그는 계절에 오면 장관이 따로 없겠다 싶다. 베로나와 베르가모를 지나쳤다. ‘베로나’라고 적힌 이정표를 보니 이번 여행에서 제외시켜 살짝 마음이 섭섭해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OST로 그 마음을 달래 본다. 마음을 달랬더니 이번엔 허기가 졌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어디서든 파스타 맛은 보장될 터이지만, 그보다 더 세계가 보장하는 맛, 버거킹을 선택했다.
GPS를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베네치아에서 멀게 보이던 풍경이 더 선명하게 나타났다. 산맥들이 제 모습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하나씩 고개를 내밀었다. 알프스가 지닌 아름다움은 겨울에 더 빛을 발했다. 설산과 돌산은 번갈아 가며 그 위용을 뽐냈다. 가끔 저 멀리 돌산의 ‘돌’ 색깔이 ‘눈’ 색깔에 가까워 설산처럼 보이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레코’라는 지역의 작은 호텔에서 조용하게 연말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숙소 인근에 있는 마트에 들러 와인, 치즈, 과일을 샀다. 호텔 도착 후 가벼운 산책만 하고 객실 베란다 의자에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배꼽시계 덕에 룸서비스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가볍게 와인잔을 부딪혔다. 크리스마스도, 새해도 해외에서 보내는 것이 처음인 우리 부부는 한 해를 돌이켜보며 새로 시작되는 한 해를 기다렸다. 와인 병을 비워가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보니 시계는 자정을 향해 간다. 졸린 눈을 몇 번이나 비볐지만,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 침대에 잠시 누웠다. 베네치아를 떠나올 때 호텔 직원이 베네치아의 새해 불꽃놀이가 장관이라며 우리가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새삼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이 작은 마을에서도 불꽃놀이를 할까?
한국에 있다면 보신각 타종 카운트타운을 헤아릴 시간, 레코 마을에서는 빨간 폭죽 한 발이 하늘 위에서 별을 그리며 불꽃놀이의 신호탄을 올렸다. 분명 호텔 건너에 있는 호수 앞 광장에서 터졌는데 그 소리가 무섭게 산 위에 있는 동네에서도, 마을 양 끝에 있는 광장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메인 광장인 코모-레코 비치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불꽃놀이가 열렸고 그렇게 2019년이 되었다. 객실 베란다에서 허공을 향해 피~이하고 올라가는 불꽃을 하염없이 쫒았다. 40분가량 이어진 불꽃놀이가 끝나니 다시 현실로 돌아온 듯하다. 정신을 차리고 새해 다짐을 해본다.
새벽 한 시를 향해가는 시계. 호텔 레스토랑에서 열리는 새해 파티는 아직도 진행 중인가 보다. 불꽃놀이 때 잠시 조용하더니 다시 음악과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를 울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