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이 밝았다. 코모(Como) 호수로 향하기 위해 자동차 시동을 켰다. 호수길을 따라 유유히 드라이브를 나선 셈이다.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산길에서 커브 길이 빠지면 섭섭하다지만, 도로 폭이 생각보다 좁아 방어 운전에 신경 써야 한다. 여행객들이야 천천히 주행한다고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차도 워낙 작은 데다 익숙한지 커브 길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 보조석에 앉아 있다가도 깜짝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있는 힘껏 안전바를 잡게 된다. 도로 사정과 달리 호수 마을 경치는 동화 속처럼 평온했고, 여유로워 보였다. 돌산인지 눈산인지 헷갈리던 산의 정체는 알프스 쪽으로 갈수록 정상에 쌓인 눈을 보면 산의 정체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레코(Lecco)에서 벨라지오(Bellagio)를 거쳐 코모까지 도착하는 데 두 시간 남짓 걸렸다. 원래는 30분~한 시간이면 도착하지만 맑은 공기와 경치가 만들어 내는 기운이 중간중간 우리를 멈춰 세웠다.
코모 호수 도착 후 적당한 곳에 주차장을 찾았다.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걸 깜박했더니 꼬모 호숫길을 걷는 것보다 화장실이 다급해졌다. 유럽의 화장실은 유료라지만, 새해 첫날 문을 연 곳은 없었다. 주차장에서 호수 방향으로 몇 개의 카페가 있었지만, 문을 열지 않아 아무 소용이 없다. 호수 가까이 있는 광장에는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문을 연 카페가 딱 하나 보인다.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다. 들어갈까 말까 하는 고민은 내게 사치이다. 손님의 유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화장실이 주목적이니. 테이블은 이미 만석이다. 커피는 바(bar) 테이블에서 서서 마시면 되니 자리가 없는 것 역시 문제가 아니다.
커피를 주문‧계산하고 남편에게 영수증을 건넸다. 그런 다음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은 딱 한 칸뿐이고 남녀 공용이었다. 이미 내 앞으로는 다섯 명이 대기하고 있다. 내 뒤로도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기다림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상황이다. 그렇게 긴 기다림 후 바(bar)로 돌아가니 이미 남편은 에스프레소 한 잔을 다 비운 지 오래고, 내 커피에는 뚜껑이 덮어져 있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더니 라테 아트가 희미해질 만큼 커피는 식어 있었다.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화장실 다녀오느라 그런 것이니 아무렇지 않게 한 잔 마시려는 순간 바리스타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는 “마담, 그 커피 차가워!”라고 말했다. 나도 식은 줄 알고 있다. 괜찮다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그는 내 앞에 놓인 커피잔을 가져가더니 아무렇지 않게 버렸다. 그리고는 곧 따뜻한 커피를 다시 만들어 내 앞으로 잔을 쓱-하고 밀었다. 손님이 없어 한가한 상황도 아니었고 이미 바에도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이 꽤 많았다. 커피를 다시 만들어준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꽤 오래 일한 듯 빠른 손놀림으로 한잔 한잔 커피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커피를 마시면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 카페가 이런 거야?”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렇진 않았다. 팔레르모, 로마, 피렌체 등 이번 여행 중에도 그랬고 한국에서도 커피가 식었다고 해서 새로 만들어 준 곳은 없었다.
새해 첫날, 내가 처음으로 마신 커피 한 잔에는 여유를 넘어 그 이상의 울림이 담겨 있었다. 바리스타 입장에서 생각하면 별것 아닐 수 있는 서비스였지만, 서비스를 받은 내가 느낀 감동은 깊고 넓은 코모 호수보다 훨씬 컸다. 그 바리스타가 커피 한 잔에 담아준 배려와 진한 감동처럼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전할 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보는 1월 1일이다. 코모 호수에서 마신 커피 한잔에 담긴 그 바리스타의 마음은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