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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vederci (아르베데르치), 이탈리아

by 셩혜

한 달여간 이탈리아 여행의 종착지는 밀라노이다. 코모 호수에서 밀라노에 도착해 호텔 체크인을 미리 하고 렌터카를 반납했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답게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들의 패션 감각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 더 돋보였다. 길거리를 누비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줬다. 온몸에 명품을 휘감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색이나 디자인의 옷을 적절하게 잘 매칭 시켰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가진 옷을 잘 활용해 센스 있게 입는다는 점이 느껴졌다. 두오모 성당 앞에 가니 런어웨이가 따로 없는 듯싶다. 거대한 광장이기도, 또 거대한 쇼장 같아 보이기도 하다. 패션쇼는 두말할 것 없고 플래시몹 같은 공연을 하는 무리도, 버스킹을 하는 이들 등 참 가지각색이다. 두오모와 비견할 만한 스폿인 스타벅스 밀라노 매장은 여행객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행객이라고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복장에서 오는 차이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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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에서 2박 3일을 꽤 여유로웠다. 해야 할 일정을 꼭 만들어 두지도 않았고 정확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발길 가는 대로 트램, 전철, 버스를 타보면서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버금가는 곳이지만 한국 여행자들이 잘 방문하지 않는 브레라 미술관(Pinacoteca di Brera)에 전시된 그림으로 여행을 돌이켰다. 북부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걸작을 소장하기도 했지만, 이탈리아 여러 지역의 풍경을 담은 회화가 많아 여행을 마무리하는 장소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나빌리(Navigli) 운하 한 카페에서 디저트를 먹고 있는 중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가 너무 반갑다며 불쑥 인사를 건넨 유학생은 어느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는 현지 맛집 정보를 알려줬다. 덕분에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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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일이라는 여행 동안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감기는 끊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여행을 왜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귀찮기도 했다. 분명 한국보다 따뜻한 날씨임에도 왜 이리 춥냐며 투덜거리기 일쑤였다. 겨울에는 따뜻한 나라로 여행 가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도 심각하게 했다. 일정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마음과 육체의 기운이 한결 나아져 좋은 것이 보이기 시작한 건 불행 중 다행이다.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공항의 투명한 창문 너머로 일몰이 아름답게 내려앉았다. 유리 너머 드리워진 붉은빛을 보니 마음이 살짝 간지러워졌다. 여행지의 좋고 싫음을 떠나 돌아간다는 아쉬운 마음 때문인지, 긴 여행이 끝난 것이 홀가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매몰차게 ‘쌩’하고 뒤돌아서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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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티브이 속 이탈리아는 내가 본 것과 다른 색을 하고 있어 종종 낯설기도 했다. 살짝 배신감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게 싫었던 시칠리아가 나올 때면 ‘여름에 가봐야 하나 봐’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힘들고 싫었다면서 또다시 그곳에 가봐야겠다고 생각을 하다니! 물론 마음에 들었던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도시가 티브이에 나올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어느 가수의 노래 제목처럼 ‘여전히 아름다운지’라는 건 사람에게만 쓰는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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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의 매일 아침 이탈리아 어느 숙소에서 써 내려간 여행 이야기는 수정과 보완을 거쳐 2020년 4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생각지도 못한 질병 앞에 전 세계가 시름하고 있지만, 언젠가 이 사태가 해결되면 나도 이탈리아도 다시 분주해지겠지. 이상하리만큼 한적하고 깨끗한 이탈리아 풍경에 다소 이질감도 느끼지만, 살다 보면 이 모습이 그리워지는 순간도 오겠지! 한 달여간 여행을 통해 많이 배우고, 또 성장했다. 언젠가 다시 찾을 이탈리아여. Arrvederci (아르베데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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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이 여행기를 마무리할 즈음 절판되었던 김영하 작가의 시칠리아 여행기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의 개정증보판 『오래 준비해온 대답』 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책이 내가 그토록 어렵고 힘들었던 그곳에 대한 기억을 씻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시선에 닿은 시칠리아의 모습은 어떤지 한번 읽어봐야겠다. 혹시 다음에 또 가게 된다면 조금은 정다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게 아니라면 정말 나랑 맞지 않는, 내가 좋아하지 않은 여행지로 남겨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모두의 기억과 추억은 똑같이 쓰이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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