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무상(無常)

'너'의 죽음에 대하여

by 이도
생(生)이란 한 조각 뜬구름의 일어남이요, 사(死)란 한 조각 뜬구름의 스러짐이다.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삶은 온전해진다.


강신주 철학자는 죽음을 세 종류로 나눈다.

1인칭인 나의 죽음, 2인칭인 너의 죽음, 그리고 3인칭인 그들의 죽음.

나의 죽음 이후는 내가 인지할 수 없기에, 결국 남는 것은 너의 죽음과 그들의 죽음뿐이다.


뉴스로 접하는 ‘그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너’가 되는 순간, 죽음은 비로소 나의 일이 된다.

관계 맺음을 통해 내게 의미를 갖게 된 너의 죽음은 더 이상 바깥 세상의 비극이 아니라 나의 상실이 된다.


죽음은 이별로 인한 너의 영원한 부재다.

내 세계에서 너를 완전히 잃는 일이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한때 가장 사랑했던 너를 떠나보낸 뒤,

나는 상실과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마음을 단단히 닫아걸었다.

새로운 ‘너’를 만들지 않으려 애썼고, 기존의 너마저 마음속에서 밀어내려 했다.

너의 숫자만큼 부재의 숫자도 늘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만남을 피했고, 오래 알고 지낸 이들과도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누군가의 호의가 부담스러웠고, 작은 친절도 상실의 예고장처럼 느껴졌다.

기념일과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숨이 막혔고, 일상의 사소한 풍경조차 마음에 파고들었다.

삶은 계속 흐르고 있었지만, 나는 그 흐름과 한참 어긋나 있었다.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한 어느 초봄의 저녁이었다.

길가에 흩날리는 꽃잎에 잠시 걸음을 멈추어 바라보았다.

예쁘다. 참 예쁘구나.

결국 지게 될 꽃이기에, 지금 더 오래 보고 싶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상실의 깊이만큼 삶의 기척은 더 선명해진다는 사실을.

부재를 통해 존재를 다시 알아가듯,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삶의 결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상실이 두려워 삶의 기쁨과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꽃이 질까 두려워 피어남을 거부하는 일과 같다.

꽃이 지기 위해 피어나는 것이 아니듯, 삶도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꽃은 피우기 위해 피고, 삶은 살아내기 위해 태어난다.

언젠가 꽃은 지고, 삶은 막을 내린다. 그래서 꽃도 삶도 더 아름답다.


그 무상(無常)함을 온전히 마주할 때에야
삶의 찬란함도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을 직시할 때, 삶은 다시 온전해진다.


활짝 핀 꽃 앞에 남은 운명이 시드는 것밖엔 없다 한들, 그렇다고 피어나길 주저하겠는가.

보통의 존재, 이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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