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혐오와 분열에서 이해와 공존으로

by 이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근래 한국 사회의 갈등은 ‘의견 차이’라기보다 ‘상대의 존재에 대한 부정’에 가깝게 보인다. 논쟁의 목표는 설득과 합의가 아니라 낙인과 추방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고유한 역사적 배경 위에 오래 누적된 조건들이 디지털 환경과 결합하며 한꺼번에 폭발한 결과다.


우선 한국 사회에는 갈등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이분법으로 굳어질 토양이 존재했다. 분단과 전쟁, 냉전 체제는 이데올로기의 극단적 대립 속에서 ‘다른 의견’을 ‘다른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었다. 정치적, 이념적 차이는 언제든 생존의 위협으로 번역되었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상대를 논리로 설득하기보다 정체성으로 배제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갈등은 조정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경제 성장의 과정 또한 양가적이다. 무엇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했던 시절, 사회는 속도와 성과를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금 필요한 것’이 아닌 가치들은 쉽게 사치로 취급되거나, 때로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빠른 성장의 이면에는 “정답은 하나이고, 반대는 방해물”이라는 사고 습관이 자리 잡았다. 합의와 숙의보다는 동원과 압박이 익숙해졌다.


급격한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도 빼놓기 어렵다. 한국은 전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빠르게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한 사회이지만, 그 속도를 공론장의 성숙이 따라가기란 쉽지 않았다. 온라인은 토론을 풍부하게 만드는 도구로 기능할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기가 더욱 쉽다. 분노와 조롱, 확신을 팔아야 주목을 얻는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복잡한 설명보다 단순한 적을 원한다. 알고리즘은 ‘관심’을 학습하고, 관심은 대체로 강한 감정에 붙는다. 그 결과 온건함은 묻히고 극단은 더욱 주목받게 된다.


한편, 정치의 구조적 유인도 크다. 오랜 기간 지속된 거대 양당 구도는 경쟁을 단순화해 유권자에게는 편리함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상대를 ‘협상 파트너’가 아니라 ‘절대 악’으로 만들어 왔다. 선거는 짧고 성과는 즉각 요구된다. 이때 가장 값싼 동원 수단이 바로 혐오와 공포다. 상대를 설득해 내 편으로 끌어오기보다, 내 편을 더 강하게 결집시키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인이 반복되면서 협치는 ‘배신’으로, 타협은 ‘굴복’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문화적 조건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개인화가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공동체의 언어보다 개인의 생존 언어를 더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경쟁의 압력이 강한 사회일수록 타인의 실패와 낙오는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처리되기 쉽다. 이때 가장 손쉬운 감정이 멸시와 혐오다. 혐오는 원인을 정확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를 ‘문제 그 자체’로 규정하면 세상은 단순해지고, 나는 상대적으로 안전해진다.


최근 한 연예인을 둘러싼 논쟁처럼, 특정 이슈 하나가 사회적 분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은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잘못했는가”라는 결론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언어가 얼마나 빠르게 ‘사실 판단’에서 ‘인격 파괴’로 미끄러지는가이다. 익명성이라는 방패, 집단의 박수라는 보상, 그리고 “내가 정의다”라는 자기 확신이 결합되는 순간, 대화는 더 이상 토론이 아니라 사냥이 된다. 그렇게 혐오는 ‘일상적인 언어’로 내려앉고, 누군가는 그 언어를 학습하며, 누군가는 침묵을 학습한다. 그리고 그 침묵은 또 다른 과열의 시발점이 된다.


그렇다면 출구는 무엇일까. 해법을 말하기 전에, 문제의 층위를 나눌 필요가 있다.


첫째, 제도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사실을 검증할 수 있는 공적 절차, 책임을 묻는 투명한 규칙,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설계된 견제 장치가 흔들릴수록 사람들은 더 쉽게 음모론으로 기울고, 더 쉽게 적대의 언어를 택한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증거’보다 ‘진영’의 논리로 움직인다.


둘째, 미디어 환경은 갈등을 증폭시키는 장치다. 혐오를 유통하는 경제가 존재하는 한, 혐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자극을 팔아 수익을 얻는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시민에게만 품위를 요구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때문에 플랫폼과 언론의 책임, 그리고 이용자의 미디어 문해력이 함께 요구된다.


셋째, 교육은 장기적인 핵심 과제이다. 혐오가 단지 ‘나쁜 마음’이 아니라 ‘학습된 언어’라면, 교정 역시 학습이어야 한다. 타인을 논박하는 법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는 법, 정확히는 “상대가 왜 그렇게 믿게 되었는지”를 묻는 습관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는 더 빠른 속도로 혐오를 생활어로 만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태도는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다정함은 감상적인 미덕이 아니라, 갈등 사회에서 요구되는 하나의 필수적인 기술에 가깝다. 상대를 ‘틀린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고, 최소한 ‘살아 있는 동료 시민’으로 대하는 태도. 말을 한 번 더 고르고, 질문을 하나 더 던지며, 상대의 동기를 악의로 단정하지 않은 일. 이런 사소한 규율이 사라질 때 사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무너진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다름’ 그 자체가 아니라, 다름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합의가 불가능하더라도 공존은 가능해야 한다. 공존이 무너지는 순간, 갈등은 비용이 아니라 위험이 된다. 한국 사회가 지금 회복해야 할 것은 정서의 미화가 아니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규칙, 곧 말의 품위와 절차에 대한 신뢰, 그리고 타인의 존엄이다.


우리가 다시 그 규칙을 세울 수 있다면 분열은 상수가 아니라 관리 가능한 영역이 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오늘 내가 타인에게 건네는 한마디 말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부디 우리 모두, 조금만 더 다정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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