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가 웃으면?
세상 가장 무해한 울음,
그 이슬처럼 투명한 눈물 앞에서
모두가 무장해제되던 조카의 첫 생일.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다가,
이내 천진난만하게 웃는 조카를 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오래된 논쟁을 떠올렸다.
맹자는 인간을 본래 선한 존재로 보았다.
그가 말한, 인간이기에 마땅히 갖는 ‘측은지심’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내면의 자연스러운 떨림이다.
아기의 울음은 배고픔과 불편함 같은 생리적 욕구의 표현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런 욕구를 결코 악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선의 씨앗’, 곧 사단(四端)이 바로 이러한 본능적 반응 위에서 피어난다고 했다.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을 해소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감각이 서서히 자라난다고 본 것이다.
이에 반해 순자는 인간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았다.
그에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욕망을 품은 존재였다.
아기의 울음은 배가 고프거나, 불편함을 느껴서 터져 나오는 지극히 본능적인 신호다. 타인을 배려하거나 양보하려는 흔적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기심일 뿐이다.
때문에 웃음 역시 단지 욕구의 충족에 불과하다.
선의 발현이 아니라, 욕망이 일시적으로 잠잠해진 순간일 뿐이다.
순자는 바로 그 지점을 인간의 ‘악’이라 불렀다.
본성이 이익을 좇고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 두면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선해지기 위해서는 본성을 다스리는 예(禮)와 규범, 즉 후천적 교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울음과 웃음은
맹자의 세계에서는 선의 씨앗이고,
순자의 세계에서는 욕망의 기원이다.
같은 눈물과 웃음이 서로 다른 철학 속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본성의 순수함을 증명하고, 다른 하나는 본성의 결핍을 증명한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울거나,
설득되지는 않는다.
아기의 울음과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닌, 그저 생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투명한 반응처럼 느껴질 뿐이다.
감정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 이전의 언어로서,
인간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며 내는 가장 원시적인 박동이 아닐까.
그저 울음은 생존의 본능이고, 웃음은 안도의 숨결이다.
맹자든 순자든 최자든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그 의미가 무엇이든, 그 눈물과 미소 자체로 그저 아름답고 사랑스럽기만 한 것을.
첫 번째 생일을 맞은 조카가
오늘처럼 맘껏 울고, 맘껏 웃으며 자라나기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울음이 부끄럽지 않고, 웃음이 낭비로 여겨지지 않는,
그런 세상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