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MBTI 과몰입 사회에 대한 단상

by 이도


“여성분이 MBTI가 T 성향인 분은 만나지 않으시겠다고 하네요.”

얼마 전 소개팅 주선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본인은 F 성향이고, 과거 연애 경험상 T 성향의 이성과는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개팅 조건의 최우선 항목을 MBTI로 정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비슷한 장면은 다른 곳에서도 반복된다.

최근 면접 자리에서 한 지원자가 “왜 MBTI를 묻지 않느냐”라고 되묻는 일이 있었다. 요즘은 어느 면접에 가도 MBTI 질문이 기본처럼 따라온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회사는 선호하는 MBTI 유형에 대한 기준도 있다고 한다.


연애든 채용이든, 중요한 만남의 문턱에서 MBTI가 1차 필터로 작동하는 풍경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물론 가벼운 아이스브레이킹이나 소소한 재미로 MBTI를 소비하는 문화 자체를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로, 더 나아가 배제의 기준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때는 혈액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B형 남자는 나쁘고, AB형은 사차원이라는 식의 농담들이 어느새 사람을 재단하는 잣대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을 네 가지 혈액형으로 구분하던 그때에 비하면, 열여섯 가지로 나뉜 MBTI는 조금은 더 정교해 보이기도 한다.


MBTI는 단순한 유행으로 치부하기엔 나름의 역사와 맥락을 가진 검사다.

외향–내향(E–I), 감각–직관(S–N), 사고–감정(T–F), 판단–인식(J–P).

네 가지 선호 지표의 조합으로 열여섯 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본래 목적은 사람을 분류하기 위함이 아니라, 각자의 성향을 이해하고 적성과 진로를 탐색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국내에서 MBTI가 폭발적으로 확산된 계기는 비교적 분명하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갑작스러운 자가격리와 단절 속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밖’에서 ‘나’로 향했다. 집 안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심리 테스트들이 유행했고, 그 중심에 MBTI가 있었다. 짧은 문항, 직관적인 결과, 그리고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명료한 서사는 불안을 잠시나마 정리해 주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문제 삼고 싶은 지점은 MBTI의 과학적 타당성 여부도, 유사 과학이냐 아니냐의 논쟁도 아니다. MBTI가 자기 이해를 위한 최소한의 언어로서 일정 부분 유의미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지금도 데이터 보완과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숱한 인간 군상을 단 16가지 유형으로 압축한 결과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태도는 분명 위험하다.


그 어떤 이론도 완벽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불완전한 프레임 안에 사람을 가두고, 그 프레임에 맞춰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버리면 사고는 쉽게 굳어진다. 확증 편향은 그렇게 작동한다.
“역시 T라서 그렇지.” “F라서 감정적일 수밖에 없어.”
이런 문장은 설명처럼 보이지만, 실은 생각을 가두고 멈추게 만드는 문장이다.


사람의 성격은 선천적인 기질 위에 후천적인 경험과 학습이 겹겹이 쌓이며 만들어진다. 그 안의 변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E냐 I냐, F냐 T냐 같은 단순한 구분에 너무 쉽게 기대고 있다.


사고형 아니면 감정형이라는 구분부터가 그렇다.

어떻게 사람이 오로지 논리만으로나 감정만으로 사고할 수 있겠는가. F에서 T까지 하나의 수평선을 그어보면 그 사이에는 수많은 지점이 존재할 것이다. 이를 숫자로 환산해 보자면 F:T 비율을 1:99부터 99:1까지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99가지 경우의 수가 나온다.


이를 MBTI의 네 축 모두에 적용하면 숫자는 더 극적으로 바뀐다.

E–I, S–N, T–F, J–P를 각각 99단계의 스펙트럼으로 세분화할 경우, 이론적으로 약 9천6백만 개의 성향 좌표가 만들어진다. 실제 인간의 복잡성을 생각하면 이 숫자가 결코 과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모든 가능성을 열여섯 개의 상자에 밀어 넣고 있다.

이것은 단순화가 아니라 성급한 일반화에 가깝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MBTI는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가’를 측정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선호와 자기 이미지를 묻는 검사라는 점이다. 자가 보고식 검사라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검사 결과가 오히려 자기 왜곡을 강화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자신을 계획적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응답한다. 그 결과를 다시 근거 삼아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변화의 여지는 닫힌다. MBTI가 설명이 아니라 면죄부가 되는 지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MBTI는 더욱 매력적으로 소비된다.

빠르고, 쉽고, 나를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시대에 사람들은 단단한 정체성을 원한다.

MBTI는 그 불안을 잠시나마 정리해 주는 간편한 라벨이다. 하지만 사람은 라벨보다 훨씬 복잡힌 존재다.


나는 MBTI 결과에 의하면 T 성향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누구보다 F적인 선택을 한다. 상황에 따라, 관계에 따라, 삶의 국면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얼굴로 반응한다. 그 가변성과 모순까지 포함할 때 우리는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물론 MBTI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일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도착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을 알고 싶다면, 충분한 관심과 시간이 필요하다. 검사 결과보다 함께 겪은 순간들이 더 많은 것을 알려주기 마련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MBTI 자체가 아니라, 사고를 대신해 주는 도구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다.


사람은 분류될 대상이 아니라 이해되어야 할 존재다.

열여섯 개의 알파벳 조합으로는 결코 다 담아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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