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집단적 허구의 서사에 대하여
또다시 크리스마스가 왔다.
해마다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희미해지는 건, 세상이 변해버린 탓일까 아니면 어느덧 내가 메말라버린 걸까.
인류사적으로 보면 크리스마스는 하나의 서사 장치이자, 가장 성공적으로 확산된 문화적 합의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작동하는 전 지구적 신화, 그리고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공유해 온 어른들의 집단적 공모.
이토록 오랫동안, 이만큼 넓은 지역에서 지속된 허구는 흔치 않다. 더욱이 이 관습이 특정 종교나 문화권을 넘어 보편적인 언어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 기원이 무엇이든 간에 이미 충분히 흥미롭다.
그 원형은 의외로 소박하다.
3~4세기 소아시아 리키아 지방에서 은밀한 자선을 베풀던 성 니콜라스 주교의 선행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후 네덜란드의 신터클라스(Sinterklaas)로, 다시 대서양을 건너 산타클로스(Santa Claus)로 변주된다. 문화권이 바뀔 때마다 언어와 복장은 달라졌지만, 간밤에 몰래 선물을 건네는 행위의 구조만은 끝내 변치 않았다.
이어 19세기 미국에서 문학과 삽화를 통해 친근한 노인의 이미지가 정착되고, 20세기에 들어 대중 소비 사회가 이를 결정적으로 고착화한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코카콜라와 함께 빨간 옷을 입은 산타는 더 이상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글로벌 표준 이미지가 되는데 신화는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서사와 결합한다. 북극의 작업장은 공장이 되고, 엘프들은 노동자가 되며, 선물은 욕망의 단위로 세분화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이 일방적인 ‘타락’으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이를 문화 접변(acculturation) 혹은 문화 혼종성(hybridity)의 전형적인 사례로 본다.
크리스마스는 특정 종교의 교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각 사회의 욕망과 생활양식에 맞게 끊임없이 번역되어 왔다. 그렇게 전 세계 각국의 크리스마스는 서로 닮았지만 같지 않다. 원본은 희미해졌지만, 대신 생존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미의 상실’이 아니라 ‘의미의 이동’이다.
원래 크리스마스가 기념하던 것은 성육신(Incarnation), 즉 가장 높은 존재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왔다는 서사였다. 오늘날 이 신학적 개념을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 핵심 정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때문에 이날만큼은 약자에게 관대해져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와 이유 없는 나눔이 허용되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작동한다.
설령 그것이 소비의 언어로 포장되어 트리와 캐럴이 상업적 장치로 기능하더라도, 이 날은 사람들에게 효율보다 마음을, 성과보다 태도를, 계산보다 관용을 우선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부여한다.
어쩌면 크리스마스의 진짜 힘은 그 원형의 순수성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원형을 수없이 훼손하면서도, 끝내 버리지 않고 지켜온 태도, 그리고 그 완강한 집요함에 있을 것이다.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상업화되었는지, 무엇이 진짜인지에 대한 담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날이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기다림의 이유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끝내 건네지 못한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장치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는 나눔과 자비의 날이다.
이 오래된 신화가 아직도 전 세계 곳곳에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크리스마스의 따듯한 그 하루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오늘만큼은 긴장을 조금 내려놓고,
노여움도 잠시 접어둔 채 사랑하는 이들에게 따스한 인사와 포옹을 건네보면 어떨까.
삶에 지친 모든 이들에게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날이 되기를.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