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유서(遺書)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을 내게

by 이도

새해 첫날에는 유서를 쓴다.

새해뿐만 아니라 매 분기마다 한 번씩, 같은 제목의 글을 덧붙여 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갸웃하며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렇게 불길한 짓을 하느냐고, 이 죽음을 끌어와 삶을 어둡게 만들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대개는 ‘유서’라는 단어가 불러오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자살, 이별, 끝. 그 연상 작용 속에서 유서는 죽음을 준비하는 일로 해석된다. 언어의 사회적 함의를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반응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태어난 날은 축복으로 기억되지만, 동시에 죽음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첫날이기도 하다.
죽음을 애써 외면하며 감춘다고 해서 그 사실이 유예되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삶에서 밀어낼수록 우리는 삶을 가볍고 표면적으로만 소비하게 된다.
역설적으로,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삶은 비로소 또렷해진다.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을 겪고 나서야 죽음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비극이 아니라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언제든 도착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내게 죽음은 늘 관념 속에 있었고, 현실의 바깥에 있거나 혹은 아주 머나먼 일처럼 여겨졌다.


그 이후 나는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하며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쓰기 시작하자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들이 생겼다.


무엇보다 유서를 쓰기 시작하면서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인류는 오래 사는 법을 끊임없이 고민해 왔고, 의학과 과학의 발전 속에서 평균수명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바야흐로 100세를 넘어 120세의 삶까지 이야기하는 시대다. 하지만 오래 산다는 것이 곧 잘 산다는 뜻일까.


막상 유서를 쓰다 보면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로서 살아왔는가 하는 질문이다.


정작 내 삶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유서에 적히지 않는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성취와 계획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애써 붙들었던 기준들도,
‘지금 이대로 삶이 끝난다면’이라는 질문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부와 명예, 사회적 평판, 일시적인 성취,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수많은 욕심과 집착들.

반대로 끝내 남게 되는 것들은 분명하다.
평범한 일상, 사랑하는 사람들, 함께 보낸 시간, 그리고 그때 하지 못했던 말들. 그 과정을 통해 내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가 또렷해진다.


그래서 유서를 쓰는 시간은 삶을 평가하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고,
무엇을 더 가져갈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아도 되는지를 분별하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변화는 지나온 시간을 속이지 않고 마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유서를 쓰는 시간은 반성이나 자기 비난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오롯이 마주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방향이 더 선명해진다. 막연한 다짐이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에 대한 기준이 분명해진다.


유서를 쓰다 보면 기쁘고 감사한 기억 앞에서는 웃게 되고, 차마 꺼내지 못했던 감정 앞에서는 울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내 감정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유서는 나를 가장 ‘살아 있게’ 만드는 글이 되었다.


유서를 쓰는 일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살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다.

무엇보다 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오늘도, 내일도 내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 인식이 삶을 위축시키지 않고, 오히려 지금의 순간을 더 소중하게 만들었다.
그저 당연하게 여겼던 하루가 다시 한번 손에 쥔 것처럼 감사하게 느껴졌다.


유언은 결코 ‘마지막 순간’에 남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죽음은 대개 예고 없이 찾아온다. 사고는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병은 마지막까지 또렷한 정신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처럼 침대 곁에 사람들이 모여 차분히 마지막 말을 전하는 장면은 현실에서는 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정말로 중요한 말들은 마지막까지 아껴두어야 할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차분히 정리해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래서 나는 유언을 미리 쓴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 있는 동안 여러 번 고치고 덧대는 유언을 남긴다.
그 글은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말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건네는 경고이자 다짐이기도 하다.


유서를 쓰고 나면 이상하리만큼 머리가 가벼워지고 마음이 정돈된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쏟던 에너지가 줄어들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또렷해진다.
남은 시간 동안 내 사람들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덜 후회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더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 데려온 글이 나를 가장 삶의 한복판에 밀어 넣었다.
유서를 쓰는 행위는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아니라, 삶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한 필수적인 의식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직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나에게 유서를 쓴다.


오늘은,
유서를 쓰기에 가장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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