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를 지배하여 제국으로 성공하는 국가 자기 개발서
학생시절에 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한번 날 잡아서 정통으로 공부해야 하는데 항상 옆가지로 빠지게 된다.
특정 테마로 다룬 세계사 책은 사람마음 홀리는 재주도 있고, 기존에 알던 역사관과는 다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니 순간적으로 깊숙한 이야기까지 내려가는 맛도 있다. 이번에 만나게 된 물류로 통해 본 세계사는 이런 맥락에 딱 맞는 책이다.
우리는 세계사를 보통 정치, 왕조, 상품/무역 정도의 기준으로 접하게 되는데, 상품을 실질적으로 고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물류이기에 무역사의 한 줄기로 역사를 조망해도 훌륭한 선택이 되리라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이야기해오던 실크로드, 대서양시대, 식민지 건설도 결국은 모두 물류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않은가? 아마존에 노트북용 SSD 메모리를 주문하면 직배송으로 1주일에만에 서울까지 배달해주는 시대. 이것이 바로 물류가 만들어낸 세계화의 꿈같은 현실화다.
책의 서두는 역사책에서 가끔 스쳐 지나가듯 언뜻 보았던 페니키아인들이 물류를 독점하여 경제적 번영을 이루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어우르는 물류지도를 그려 나간 것이다. 역사적 쇠락 속에서도 카르타고가 그들의 정통성을 이어받았고, 이베리아 반도에도 카르타헤나, 아르메니아, 발렌시아, 바르셀로나 등의 식민지까지 건설한다. 하지만 경제적 팽창은 결국 로마와 충돌을 일으켰고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 패함으로 유럽의 역사는 로마의 발 밑에 놓이는 결과를 나타낸다. 하지만 지중해의 세계를 건설한 업적만으로 그들의 역사적 가치는 충분할 것이고, 이를 이어받은 로마는 대제국을 구축할 수 있었다.
중국의 물류는 춘추전국시대에 왕성해졌다고 하는데, 결국 정치 경제의 경쟁은 부의 축적과 이동이 쉽게 가능한 방향으로 발전이 되고, 재화를 이동시키고 공급하는 물류도 더욱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 시황제가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에 막을 내리고 중국을 통일하면서 단절되었던 물류의 길 역시 통일되며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더욱이 반량전으로 통화를 통일하여 광역거래를 쉽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단일 통화권으로 만든 셈이다. 문자 역시 전서로 통일했는데 발음이 지역적으로 달라도 문자가 같아 쉽게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중앙집권적 제도인 군현제 역시 불필요한 비용이 전국 각지에서 남발되던 상황을 정리했다. 이로서 중국의 상품은 하나의 통일된 시장에서 유통되기 시작했고, 이 시스템은 한무제까지도 연결된다.
한무제는 베트남이나 한반도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데 이로 인해 국고가 항상 바닥을 보이려 했다. 그래서 실시한 것의 철과 소금을 국가사업으로 지정한 것이다. 지금까지 폭리를 취하던 독점업자들에게는 날벼락이었겠으나 국가의 경제력을 굳건히 해주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균륜법을 통해 지방에 경제 책임자를 주둔시켰고, 평준법을 균륜관이 실행할 수 있게 하여, 물가가 떨어지면 물건을 사들여 물가를 올리고, 물가가 오르면 사두었던 물건을 판매해 물가를 조정했다. 근대적인 국가경제 개입을 통한 안정화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제적 안정을 통해 한나라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가 현재 EU처럼 통합된 경제체제를 갖추고 경쟁력을 키울 수 있던 계기가 된다.
무슬림 상인들의 이슬람의 번영과 연결된 상황, 상인으로서 역량이 뛰어났던 바이킹은 서양사-동양사가 연결되는 역동적인 모습으로 물류와 교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교역의 방향은 세계의 주도권 경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의 경제패권이 유럽으로 넘어가는데도 물류의 방향성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결정적인 계기는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1488년 희망봉에 도달하고, 1498년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에 도달한 사건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일과 맞먹는 수준의 새로운 항로 개척의 역사적 장면이다. 이후 향신료의 운송에 기존에 활용되던 홍해와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가는 항로는 서서히 쇠퇴하게 되고 이탈리아 역시 물류사의 뒤안길로 쫓겨난다.
포르투갈이 아시아에 진출한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등이 동인도회사 등을 설립해 아시아 무역에 뛰어들었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던 상품의 방향이 역전되기 시작한다.
재미난 것은 포르투갈은 국가적으로 열강에 밀렸지만 포르투갈 상인들은 영향력을 상당기간 가졌다는 점이다. 국가의 지원이 없더라도 상인들만의 네트워크와 물류 장악력이 가능하다는 증거인 동시에 이들을 지원하는 국가적 지원이 없다면 결국 세계사의 방향은 국가의 힘에 좌우된다는 점을 동시에 깨닫게 해준다. -심지어 포르투갈 국왕이 무역을 독점했던 향신료 무역에도 사무역 상인이 참여할 여지가 있었고 전체의 40% 정도를 가져갈 수 있다는 점은 특이하다. 그렇다고 딱히 상인들을 지원해주는 제도는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베리아 반도,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에 걸친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기까지 했다. 아시아 상인들이 희망봉을 넘어 유럽이나 대서양으로 진출하지 않은 것은 특이할 부분이다. 특히 화교들이 무역루트를 따라가지 않은 이유가 궁금한데, 중화사상으로 똘똘 뭉쳤더라도 새로운 재화와 상품이 넘쳐나기 시작한 유럽 쪽을 넘보지 않은 역사적 사실은 이해가 가지도 않고 기회를 놓치고 역사의 패권을 넘겨준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는데 아쉬움이 크다.
최초의 패권국가는 "네덜란드"라고 한다.
지금도 유럽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지만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은 금방 와 닿지는 않는다. 네덜란드의 튤립 투자 열풍이 경제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떠올리면 약간 와 닿는 부분은 생긴다. 패권국가는 "가장 강력한 국가"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경제 측면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지닌 국가로 해석하는 게 맞겠다. 세계 경제이 규칙을 정할 수 있는 것으로 유럽 전체의 표준이 네덜란드가 된 것이다. 그들은 유럽 이곳저곳으로 상품을 운송하는 사이 유럽 물류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원래 네덜란드는 발트해 지방의 해운업으로 성공가도에 들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물류 시스템은 발트해 지방의 해운 자재를 각 유럽국가들에 공급했는데, 아시아로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배를 만들어야 하고, 해운 자재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덩달아 네덜란드의 수익도 치솟은 셈이다.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아시아 항로의 위험성을 갖지 않고 유럽국가들만 상대해도 막대한 이윤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은 행운도 뒤따른 덕이다. 유럽의 인구증가와 대도시의 성장은 필요식량 증가로 물류가 확대되는데 이 역시 네덜란드가 맡게 되어 대서양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다. 특히 유럽 최고의 곡창지대인 폴란드에서 수출되는 곡물의 운반은 네덜란드 상인들이 좌지우지했다 한다. 이 시기 유럽 선박 중 네덜란드 선박 비중이 무려 3/4였다!
네덜란드에 이어 두번째 패권국가가 된 영국도 그 배경에는 막강한 군사력도 있지만 전세계 물류를 장악한 힘이 뒷받침을 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정치적인 식민지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식민지가 된 "비공식 제국"에 포함되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과 라틴 아메리카였다. 왜냐하면 영국을 통하지 않고는 세계와 교역을 자체적으로 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세 유럽의 운송비는 우리 생각보다 운송비가 극도로 비쌌던 탓에 중계무역의 수입이 상당했다. 그래서 몇몇 나라는 네덜란드의 운송료 수입을 제한하오 자국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보호 해운업 정책을 채택했는데, 유일하게 영국만 성공했다. 영국은 네덜란드의 성공을 지켜보며 물류를 통제하는 힘이 얼마나 국가적인 수익을 높일 수 있는지 깨달었고 항해법 제정을 여러차례 진행하며 자국과 관련된 무역에는 영국선박에만 실을 수 있는 보호정책을 관철시켰다. 이로서 영국은 1572년 5만톤의 소유 선박을 1788년에는 105만톤으로 200년만에 21배나 증가시키게 된다. 산업혁명으로 수출할 물품인 면직물이 대폭 생산 확대된 점도 무역으로서의 해운사업을 융성 시키는데 중요한 포인트다.
20세기초에는 톤수로 따졌을 때 영국선박이 세계 선박의 약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 이때 옆나라이자 오래된 원수인 프랑스는 혁명을 완수하느라 바빠서 물류혁명은 해낼 수가 없었던 효과도 있었다!
그 이후는 전세계는 물류로 통합되고 더 넓은 범위에서 교역이 일어난다. 정치적인 이유로 쫓겨났던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신대륙으로 성장시키며 교역량을 올리는데 역할을 했고, 호주대륙까지 유럽인들이 진출하며 활발한 무역은 물류 시스템을 통해 세계화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해양뿐 아니라 철도의 발견은 육상으로도 대단위 상품의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 이후 비행기의 발명은 인간의 물류시스템을 시간과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고도화를 가능하게 한다.
세계화된 무역은 국가간 빈부차도 심화 시켰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계인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소비재들을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조금 더 빨리 사용하게 되는 이점이 되었다. 그만큼 생활이 윤택 해진다. 그에 반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인공위성을 띄우고 사람을 우주로 보낼 정도의 군사적 역량은 강화되어 강력한 두 나라의 군비경쟁 속에 성장했다는 착각에 빠지지만, 자국의 소비재 생산은 물론 세계적인 교역에도 벽에 부딪혀 결론적인 공산주의 해체라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만큼 물류는 오래 전부터 세계를 지배하였고 지금은 더 발전하며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됐다. 온라인의 강세와 코로나19로 인한 위기가 닥친 현재시점에서도 우리는 아마존에서 물건을 직구하고, 기름값이 떨어지던 오르던 사우디에서 석유를 수입해야 와야 하며, 최신형 스마트폰들은 전세계로 운송되고 있다.
전쟁과 정치가 세계사를 주도했지만, 그 이면에서 경제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물류라는 심장이 뛰고 있었다. 격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고 앞으로도 세계의 판세를 읽기 위한 중요한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