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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밤 Mar 18. 2021

혼자노는기록#5) 무궁화호 타고 경주 야경 보고 오기


경주역이 신경주역에 통합되면서 사라질거라는 소식을 알게 됐다.

곧 없어질거라고 생각하니까 왠지 꼭 가보고 싶어졌다.

혼자여행 위시리스트 중에 경주가 있었기 때문에 기왕 이렇게 된 거 서둘러서 휴가를 내고

경주역을 목적지로 잡아 무궁화호를 타고 떠났다.

청량리역부터 경주역까지 무려 5시간이 걸렸다.

2시간짜리 영화를 다 보고난 후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꿔져 깜짝놀라 깰 만큼의 꿀잠에 3번 빠졌는데도

도착 소식이 들리지 않았던 정말 길고 긴 여행길이었다.


도착한 경주역은 머릿속에 그렸던 긴 세월이 담긴, 곧 사라질 옛스런느낌을 간직한 곳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자그마한 현대식 기차역이었는데 내가 <경주역이 곧 사라진다!>에 꽂혀서

막연히 어떤 유적같은 공간을 기대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 버스로 3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의 대릉원으로 향했다.

유적 사이를 천천히 산책하던 중 내 앞에 걷던 아저씨가 양손에 어린 두딸의 손을 잡고는

왜 이름이 박혁거세냐는 아이들의 돌발질문에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덕분에 20년전쯤,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대릉원 천마총에서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기억났다.

앞에 아빠 손을 잡고 걷는 저 조그만 아이의 나이때쯤의 나도 가족들의 손을 잡고

이곳에 이런저런 추억들을 새겼었는데 이제 그런 공간에 혼자서 거닐다보니

순식간이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 많이도 흐른것 같아 슬퍼졌다.



대릉원 산책을 마친 뒤 후문으로 나와서 황리단길을 걸었다.

황리단길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날씨는 구름 한점없는 푸른하늘에 정말 좋았지만 대신 햇빛이 너무 뜨거웠다.

전기바이크를 빌려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무면허 뚜벅이의 비애감을 느꼈다.


배도 고프고 슬슬 지쳐갈즘 미리 검색해둔 혼밥 가능한 피자집에 마침내 다다랐다.

하와이안 피자 한 조각에 스텔라 맥주 한잔을 시키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경주에서의 늦은 점심을 즐겼다. 차가운 술한잔에 더위도 잊고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체력을 보충하고 나와서 500원을 주고 도깨비명당 뽑기운세를 뽑아 근처의 예쁘고 한적한 카페에 들어갔다.

사이공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천천히 읽어보았다.

동북양방의 귀신이 나를 돕고 장군이 말을 몰고다니듯 운세가 풀려나간다고 써있었다.

생각해보면 운세에 써진것처럼 요란하진 않지만 나름 운이 좋았다 싶었던 일이 꽤 있었던 것 같다.

벌써 올해 2/3가 지났는데 남은 1/3도 무사히 흘러갔으면하고 바랐다.



이제 마지막 스케쥴인 동궁과 월지 야경만 보면 되는데

오늘의 점등시각이 7시 16분이라 2시간정도가 붕 떠버렸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2정거장 정도를 지나 계획에 없던 경주박물관에 들렀다.

나는 박물관에서 크게 감동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라 학창시절 이후 정말 오랜만에 찾아가게 된 셈이었지만

내가 무슨 타입이던 상관없이 박물관 특유의 절제된 고요함은 분주하게 보냈던 나의 하루에

알맞은 쉼표가 되어주었다.

그곳에서 더운 땀도 식히고 하루도 돌아보며 여유를 찾았다.



점등시각이 다가와 슬슬 동궁과 월지까지 걷기로했다.

핑크빛 노을이 지는 하늘아래 유적지라 그런지 시야를 가리는 큰 건물하나 없이

넓디 넓은 길을 걷는건 낭만적인 경험이었다.

7시정도에 입장했는데 여름이라 아직도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서 하늘이 훤했다.

그때 직감했다. 막차시간에 맞추려면 야경을 볼수 없을 거란 것을...

점등시각이 가까워오자 사람이 점점 많아졌고 야경 핫플레이스로 예상되는 곳은 이미 발디딜틈도 없었다.

나도 핫플레이스 중 한 곳을 가까스로 사수해 점등이 될떄가지

20분간 오도가도 못하고 자리를 지킨 뒤 조명이 하나 둘 켜지는 걸 지켜보았다.

하지만 내가 막차시간때문에 자리를 떠날때까지도 여전히 하늘이 충분히 어두워지지 않아서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채 경주를 떠날수밖에 없었다.



나의 하루를 온전히 경주로 채웠다.

집과 멀리 떨어진 곳을 다녀올때면 늘 상쾌한 해방감이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워준다.

누가 날 가둬놓은 것도 아닌데 일상이 얼마나 스스로를 구속할때가 많았나 싶기도 하다.

다음 여행이 기다려질 정도로 여운이 진한 경주에서의 하루였다.





경주행 무궁화호 : 23,800원

서울행 KTX : 49,300원

기차에서 먹을 간식 : 9000원

대릉원 입장료 : 3000원

점심(피자 한조각+스텔라맥주 1잔) : 13,900원

사이공커피 : 5,500원

동궁과월지 입장료 :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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