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흔드는 영화를 만났다.
미래에서 온 편지 같달까
...
주인공 할머니, 할아버지 때문에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토요일에 있을 결혼 45주년 기념식을 앞둔 월요일.
케이트와 제프 부부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제프 할아버지가 결혼 전에 사귀었던 첫사랑,
카티야의 시신이 알프스 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
....
저 나이에도 첫사랑이 문제가 될 수 있다니!
첫사랑만큼 진부한 소재가 있을까.
그런데 이 영화는 전혀 진부하지 않다.
결혼기념식 당일까지 6일간 펼쳐지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신경전이
섬세하고 밀도 있게 펼쳐진다.
은퇴 후, 별다른 활동 없이
집 근처를 산책하는 것도 마다하며
조용히 집에만 있던 제프는
이 편지에 크게 동요한다.
뜻밖에 날아든 카티야의 소식이
그에게 잊고 있었던 젊은 시절을 환기시키며
자신의 삶을 통째로 되돌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첫사랑 카티야에 관한 추억을
케이트에게 이야기한다.
험산 준령의 알프스를 등반하며
유리걸식하던 자신들을
눈 녹은 풀밭에 불쑥 솟아난 제비꽃 같이
의지가 충만했다고 술회하는데
케이트에겐 이야기 속의 젊은 제프가
낯설기만 하다.
결혼 전의 일이니까,
나를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니까,
그것도 너무 오래 전의...
케이트는 그의 이야길 들어준다.
그래도 한 때 좋아했던 여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데
잠깐의 감정적인 동요 정도는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아내가 받아줄 수 있는 선을 넘어간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한밤중에 다락방에 올라가 카티야의 사진과
옛날에 썼던 여행일지를 꺼내보고
생전 나가지도 않던 시내에 버스까지 타고 나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아내 몰래 알프스행 차편을 알아본다.
케이트는 그들이 함께 살아온 지난 45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데
그는 다른 여자와 함께 했던 과거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난 제프가 너무나 사랑했던 첫사랑을
여전히, 아직도 못 잊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느꼈지만
아내인 케이트의 입장이 제삼자인 나와
같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케이트는 달라진 남편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아무리 나이 먹은 할머니가 되었다지만
아내인 자기 앞에서 대놓고 첫사랑의 그림자를
탐닉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을
마냥 관대하게 받아줄 수는 없는 것이다.
제프에게 첫사랑 카티야는 그녀가 죽어서
이룰 수 없었던 안타까운 사랑이라기 보단
'젊음의 상징'같은 존재로 보인다.
제프는 카티아의 소식을 듣기 전까지
딱히 과거를 돌아볼 이유도 없었고,
아내와 함께 하는 조용하고 안락한 일상에
별생각 없이 만족하며 지냈다.
하지만 첫사랑 카티야가 설빙 속에
50년 전 모습 그대로 묻혀있다는 걸
생각하게 되자, 자신의 변해버린 모습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50년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온 걸까?
25살의 제프는 카티아와 함께
문명을 거부하며 대안적인 삶을 추구했다.
그는 자신이 목적의식이 분명했다고 회고한다.
보수당 출신의 마가렛 대처 수상에 반대했고,
대처를 지지하는 사람을 파쇼라고 비난할 정도로
진보적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그렇게 패기 넘치고 용감했던 모습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는 완전 백발에 늙어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싫어하는
자신이 있을 뿐이고
...
제프는 혼란스럽다.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들도 다 만나기 싫다.
그가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던
예전 직장 동료들의 모임을 다녀와서
한때 빨갱이 소리를 듣던 친구가 지금은
몫 좋은 곳에 별장을 짓고,
은행가인 손자랑 골프나 치러 다닌다고
비난하듯 이야기하면서
그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새삼 곤란해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어떤 심정인지 알 거 같더라.
내가 살아온 내 삶인데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
이제와 세월을 돌이킬 수도 없는데...
제프가 시간 앞에서 느끼는 강한 무력감이
내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
벤치에 앉아 아내 몰래 담배를 피우다 들켰을 때
그는 카티야를 그리워하던 게 아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이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내가 이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줄 거라 믿는다.
그에겐 케이트가 전부니까.
딱히 만나는 친구도 없이 집안에만 머무는 그가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견딜 수 없는 회한을
조금이나마 내 비칠 수 있는 사람은
케이트 밖에 없다.
하지만 친구 같은 아내라고 해도
아내는 아내지, 친구가 아니다.
케이트는 제프가 집을 비운 사이에
다락방에서 카티야의 사진을 본다.
그리고 죽기 전의 카티야가 임신 중이었단
사실을 알게 된다.
카티야는 정말로 그냥 여자 친구였을까?
남편의 옛 여자 친구가 남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결혼한 지 45년 만에 알게 되었다.
이제와 결혼을 무를 수도 없고
따져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아는데
기만당한 것 같은 이 느낌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제 케이트의 눈에 지난 결혼생활이
전부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다.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카티야의 그림자가
부부관계의 배경에 깔려있었다는
생각에 괴롭다.
기념일이 다가오자 제프는
과거의 늪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케이트 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평소 싫어하던 산책을 나가자고 한다.
카티야의 소식은
그를 잠시 회한에 사로잡히게 했지만
젊었을 때 가졌던 마음가짐으로
남은 삶은 충실하게 살아보자고
다짐하게 만든 것 같다.
부부는 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
파티장에서 춤을 춘다.
제프가 케이트를 위해 깜짝 선물도 준비하고
사랑과 감사를 고백하는 연설도 하지만
45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실감케 하는
이 파티장에서
케이트는 그 시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모양이다.
음악이 끝났을 때 갑작스레
제프의 손을 뿌리치는 그녀의 모습에서
상실의 아픔이 느껴졌다.
자식도 없는 이 부부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45년이란 긴 세월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서로에 대해 이제 눈빛만 봐도
다 알 수 있다고 믿을만한 시간이 아닌가
.....
카티야라는 먼 과거의 존재가
이 단단한 관계에 균열을 내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가 상대에 대해 잘 안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인지 깨닫는다.
무엇보다 제프에게서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어쩐지 나 이대로 늙으면 제프처럼 될 거 같아...'
인생 참 뜻대로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제프의 나이가 돼서 회한에 사로잡히면
너무 힘들 거 같단 생각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더라.
왜냐면 다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까...
그때 가서 느끼게 될 무력감은
상상할 수도 없다.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 20대의 나와는 너무도 달라졌지만
그리고 그때처럼 살 수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지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더 늦기 전에'
이 단어가 머릿속을 맴돈다.
더 늦기 전에....
by 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