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봄 Jul 16. 2017

다자이 오사무 <개를 키우는 이야기 외 2편>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특별히 더 잘 맞는
작가가 있을 것이다.
그가 유명 작가이든
내로라하는 문학상 수상자이든
그런 건 상관없다.
그냥 유독 나랑 잘 맞는 작가.
문장이 내 호흡처럼
지면 위에서 흐르는 느낌을 주는.


이 글을 읽으면서 딱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내게는 다자이 오사무가 그렇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의 소설을 읽었다.
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웃음이 나왔다.


어떤 이야기를 꺼낼 때 운을 띄우는 방식,
이야기를 서술해가는 방향 감각
그런 것이 몹시 나답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내 마음에서
막힘없이 전개된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읽었던 문장을 다시 읽는 법이 없다.
되돌아가는 법도 없다.
읽는 동시에 흡수된다.
마치 내가 하려던 이야기가
내 눈길보다 한 발 앞서 종이 위에
찍히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자연스럽다
번역된 문장임에도.


한 시절 무척 가깝게 지냈지만
사느라 바빠서 통 만나지 못하던 친구를
다시 만나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으로 읽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한 그 애의 매력에
맞아, 네가 그랬어,
그래서 내가 정말 좋아했었지,라고
생각하듯이.


폰트와 글자크기, 여백도 딱 맘에 드는 편집




수록된 3편의 단편이 모두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어
화자와 더욱 혼연일치가 되어 읽을 수 있었다.


<개를 키우는 이야기>


아...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주인공은 '개'를 싫어하는데
개에 대한 그의 다소 과대망상적인
생각이 솔직하게 전개된다.


개를 보고 '지금은 저렇게 하찮은
짐승이라도 된다는 듯 자기 비하를 하면서
거리에서 쓰레기통 속이나 뒤지고 있지만, '
하는 이런 표현은 딱 내 스타일이다.


주인공은 소설가인데
글을 쓰기 위해 아내와 함께
시골의 작은 마을에 내려와 있다.
그런데 뜻밖에 그 동네에
개가 엄청 많은 것이다.


 개가 무섭고,
개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은 와중에
그는 개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아주 세심하게 자신의 행동거지를
연출하게 되는데
그 결과 개들이 그를 좋아하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푸하하하!!


 결국 자기 집까지 따라온 못생긴
강아지 한 마리를 집에서 기르게 되고
그 개와 애증의 관계를 만들어간다.
말로는 끊임없이 개가 싫다고 하지만
막상 그 강아지를 거둬 기르는 그는
이미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묘사하는 개의 속성은
기실 그가 싫어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개가 아첨쟁이에
수치심을 모르고
나태하고 천한 근성을 지녔다면서
 어쩐지 나를 닮은데도 있는 것 같아
더더욱 싫다고 고백한다.


버리고 싶고, 죽일까도 생각했던
그 강아지를 결국 도쿄까지
데려가기로 결심하면서
그는 자신을 수용하고, 작가로서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다소 어처구니가 없지만 말이다.


나도 직접 강아지를 키우기 전까지
개를 무서워했던 터라
주인공의 심정이  잘 이해되었다.
짧은 콩트 같은 이 단편은
체홉의 단편 희극을 떠올리게 했다.
 웃기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여치>


24살의 주인공 여자는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그에게 편지를 쓴다.
이 소설은 서간문 형식으로
남편의 위선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고발하고 비난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여자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년 전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가난한 무명 화가였던 남편의 예술혼에
반한 여자는 그와 함께 하는 가난한 삶에서
낭만을 발견하고 행복했다.


여자는 오직 자신만이 남편의 재능을
제대로 알아보고 있다고 믿었고,
그가 유명세나 돈에는 관심 없이
자신의 작품세계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여겨
그를 돌봐주고 헌신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명한 화가가 되고, 그의 그림은
비싼 값에 거래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의 속물적인 근성이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데
그녀는 경악하고 만다.


그녀는 돈을 밝히며 허세를 부리는
남편의 행동이 벼락부자들이
하는 짓거리와 다를 바 없다고 비난한다.
 그는 동료 화가나 스승 앞에서는
웃는 얼굴을 하고
뒤돌아서서 그들을 욕하며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아는 척하며
아내인 화자가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읊는 등
누가 봐도 추접스러운 짓을 한다.


주인공이 볼 때 그는 망해 싸다.
위선이 까발려져야 하는데
그는 더욱더 성공하고, 존경받는 화가가 된다.
자신이 욕했던 동료들을 모아 파벌을 만들고
미술계에서 실력을 행사한다.


여자는 남편이 라디오에 나와
사람 좋은 척 감사 인사를 하는 걸 듣고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더는 보아 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구역질 난다고 한다.


남편에게 당신의 신화는 하루빨리
무너져야 한다고 말하는 여자는
그날 밤 자리에 누워 툇마루 밑에서 우는
여치 소리를 듣는다.
자신의 등줄기 바로 아래서 우는 통에
울음소리가 마치 자신의 등 속에서
나는 것처럼 들렸다는 여자는
'이 자그마한 미물의 희미하고 미약한
소리를 평생 잊지 않고 등줄기에 간직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말한다.
그것은 예술가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 같다.


주인공의 혐오스러운 남편 같은 인간을
많이 봐왔던 터라
구구절절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여자'가 지닌 '가난한 예술가상'이
'예술가에 대한 낭만적 환상'일뿐이란
생각도 들었다.


여자는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고
그런 그녀에게 가난은 '실제'가 아니라
 '놀이' 가 될 수 있다.
그녀는 아직 젊고, 젊을 때는 가진 것
없이도 당당할 수 있다.
물론 세월이 지나도 이런 정신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녀가 바란대로
남편이 정말 마흔이 되고 쉰이 되도록
여전히 무명이고 살림살이가
 한 치의 발전도 없다면
과연 그때에도 그녀는 지금처럼
청빈한 삶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궁금해졌다.
여치 소리를 가슴에 품고 살겠다 다짐했던
24살의 그녀가 44살에도 54살에도
여전히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지.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면서.



<급히 고소합니다>


<유다의 고백>이란 제목으로도
번역된 적 있는 이 소설은
주인공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고자
대제사장 무리를 찾아가 그들에게 들려주는
자신과 예수에 관한 이야기다.  


유다의 분열적인 정신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며, 그의 육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느낌마저 주는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가 입으로 말하는 걸
아내가 받아 적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순간에 정말 유다가 다자이에게
빙의된 건 아닐까 혼자 상상해봤다.


소설을 입으로 구술할 당시
작가의 모습은 어쩌면 일인극을 하는
배우의 모습이었을 거 같아
더욱 흥미롭다.


이 소설 속에서 유다는 예수를
무척 사랑했고,
예수를 아름다운 사람이라 칭하며
흠모했지만
동시에 예수가 사역 현장에서 보이는
언행을 유물론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자신의 인식의 틀에서
온전히 이해되지 못하는 예수는
그에게 가깝고도 멀기만 하다.
예수는 결코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유다 본인이 아니었다면
예수와 그의 제자 무리는 사역에
필요한 기초 자금도 마련하지 못하고
밥도 못 먹고 다닐게 뻔한데
그런 자신을 속물적으로 보는 것에
화가 난다.


이런 유다의 모습은
영화 <은교>에 나오는 시인 적요의
제자 지우를 연상시켰다.
공대 출신인 그는 글을 쓰고 싶지만
그의 뇌는 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유다는 예수를 동경하면서도
그가 제시하는 영적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에  
제자들 무리 가운데 소외감을 느끼고
그것이 마침내 스승에 대한
분노로 표출된다.


예수에 대한 동성애적 감정을 가진 체
막달라 마리아를 두고 예수에게 경쟁심을
느끼기도 하며 스스로 당황하는 유다는
이렇듯 예수가 자신의 마음에 일으킨
파문을 온전히 헤아리지도,
수습하지도 못한 체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이런 유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째서 예수가 그에게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될 정도다.
그의 사랑과 분노가 너무 딱하다.


마침내 그는 앞에서 자신이 한
모든 이야기를 다 뒤집어엎고
그냥 돈 때문에, 돈이 좋아서
 예수를 파는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게 진심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약간 실성한 듯도 보이고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서
스스로를 천하의 악인으로 만드는
자학의 극치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잠깐의 시간이 흐르면
어쩌면 정말 돈 때문에
팔았을지도 몰라하는 의심도 들고...
진심은 뭐 유다만 알겠지.
본인도 모를지도 모르고...


다소 치기 어린 느낌도 들지만
캐릭터가 글자 안에 머물지 않고
정말로 살아 숨 쉬는 사람처럼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다.



돌아서면 잊어버릴 이야기로
가득한 sns 창을 잠시 닫고
짧게나마 이 책 속으로
나들이를 갔다 오면 어떨까?
추천한다.


책이 워낙 얇고,
손에 쥐기 좋은 사이즈라서
핸드백 안에 휴대하고 다니며
짬 났을 때 읽기 딱 좋다.



by 이봄


                                                  

매거진의 이전글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