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봄 Jul 25. 2017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 이야기의 힘


                                                                                                                                                                                                                                                                                                                                                                                                                                                                                                                                                                                                                 





이 책을 읽은지는 한참 되었는데
좀처럼 리뷰를 쓸 짬을 만들 수가 없었다.
이제야 리뷰를 쓰려고 책을 다시 들춰보니
한참 읽던 중에 자주 느꼈던
가슴의 뜨거운 울렁거림이 다시 올라왔다.


그랬다. 이 책은 내 가슴에 자주 열기를 일으켰다.  
그것은 우리가 '열기'라는 단어에서
쉽게 연상하게 되는 어떤 움직임을 추동하는
그런 뜨거움이 아니다.
말 그대로 가슴에 느껴지는 열감이었는데
살갗에 난 생채기가 아물 때 느껴지는
그런 뜨거움이었다.
한 두 번은 정말로 그 뜨거움 때문에
가슴을 움켜쥐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는데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환기시키는
내 안의 어떤 기억들과 현재의 상황 때문에 그랬다.


저자인 리베카 솔닛은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딸이었다.
세 명의 형제들이 있었으나
엄마가 알츠하이머에 걸리자 그 엄마를 돌봐야
하는 일은 그녀의 책임이 되었다.
삼십 대에 엄마와 절연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딸에게
엄마는 평생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이 책은 그 숙제 같았던 엄마를 돌보면서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는 긴 여정에 관한 기록이다.


치매에 걸려 더 이상 자신의 집에 머물 수 없게
된 여인이 집을 떠나고, 그녀의 아들 하나가
집 마당에 있던 살구나무를 정리한다.
약 45킬로그램의 엄청난 살구 더미는 하나뿐인
딸의 집으로 배달되고, 처치 곤란한 살구 더미
앞에서 딸은 생각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떨어진 임무인 동시에,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았던 어머니가 남긴 자신의 상속권, 동화 속
의 유산 (27p)' 같다고.  


살구를 든 그녀는 이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다.
엄마를 상징하는 살구라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하는.


평생 자신을 구해줄 왕자를 기다렸던 신데렐라
같았던 엄마. 백설공주 이야기 속에 나오는
거울 같이 엄마를 비추었던 자신.
딸은 엄마와 만들어 온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이야기들 속을 탐험한다.
눈의 여왕, 프랑켄슈타인, 체 게바라,
아이슬란드의 늑대 이야기,
에스키모 여인의 이야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천일동안 이야기를
지어내던 셰에자라드....


이 많은 이야기들은 늙은 알츠하이머 환자를
돌봐야 하는 현실의 고통을 견디는데 도움을
주는 실질적인 수단이자, 오랜 시간 가슴 안쪽
을 파 들어가던 관계의 상처를 치유하는 약이 된다.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리베카 솔닛의 눈을 통해 새롭게 조명된다.
작가의 통찰력은 우리가 그 이야기들 속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의미를 밝혀준다.
그녀가 풀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모두의 삶이 보이지 않는 저 안쪽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감정이입'을 통해서만 조금이나 서로의 삶에
진실되게 다가설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솔닛과 함께 이야기를 탐험하는 매 순간은
정말 아름다웠다.


어떤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조금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솔닛은 이야기를 통한 내면의 여행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여행을 하는데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늘 동경해 온 극지방,
아이슬란드로 떠난다.
차갑고 낯선 자연 풍경 속에서
다른 작가들의 예술 작품을 통해서
그 지역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녀는 자기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단초를

얻는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멀리 갔다 돌아오는 동화나 민담의 주인공처럼
자기 숙제를 풀어낸다.  
엄마가 만들어 낸 이야기의 속박을 풀어내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든다.


나 역시 수수께끼 같은 엄마를 두고
그 엄마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포용하기
까지 힘든 과정을 거친 딸이기에,
곁에 98세의 노모를 돌보느라 시들어가는
이모를 두고 있기에,
더욱 깊이 공감하며 읽었던 거 같다.


또 나는 이 책을 통해 크게 각성하였는데
내가 내 인생의 서사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 마음가짐의 문제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인류가 여성들에게 부과한
질곡의 서사를 깨부숴야 한다.


이 책은 인간에게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환기시킨다.
인류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왔는가.
아이들은 왜 본능적으로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삶을 속박하는 이야기,
삶을 해방시키는 이야기,
이야기를 분별하는 능력 또한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자기 삶을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반드시 한 번 더 읽을 것이다.
<멀고도 가까운>을 읽고,
나는 이야기 탐구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야기가 좋다.



독서 또한 하나의 여정이다.
눈은 선처럼 펼쳐진 생각을 따르고,
책이라는 압축된 공간에 접혀 있던 그 생각들이,
당신의 상상과 이해 안에서
다시 차근차근 풀려 나간다. 278p


당신을 듣는 이는 누구인가.
(중략)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작품 속에 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가파른 경사면에 세워진 건물에 있다.
경사면 위쪽에서 보면 1층인 곳이 아래쪽에서 보면 2층이다.
누군가 이 장소를 끊임없이 고민하여 꼭 어울리는 건물을 설계했다.
다른 누군가는 해안가를 따라 들어선 숲에서 목재를 구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건물의 기초를 세우고, 벽을 바르고 참나무 마루를 깔고,
관을 설치하고 배선도 마쳤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도 누군가가 디자인하고, 다른 누가 만들었다.
그 모든 일이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졌다.
280p                                                                                                  





by 이봄



매거진의 이전글 최은영 <쇼코의 미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