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에서 출판하는 <아무튼 시리즈>가 책좀 읽는다는 독자들 사이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난 좀처럼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무튼 시리즈>는 작가 본인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출판사 소개글 인용)인데 지금까지 내 눈에 띈 시리즈 중에서 딱히 마음을 끄는 주제가 없었던 탓도 있고, 사놓고 미처 다 읽지 못한 밀린 책이 항상 쌓여있는지라 이런 류의 가벼운 에세이까지 읽을 시간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번에 gaga77page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주저없이 데려왔다. 로드무비라면 나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로드무비>는 20세기에 미국과 유럽에서 제작된 로드무비의 특징을 전반적으로 알아보기에 좋은 책이다. 여기에 소개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더욱 공감하며 읽을 수 있고,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여러 로드무비가 갖는 다양한 의미와 매력에 금방 빠질 수 있을만큼 작가의 입담이 좋다. 빔 벤더슨과 자무시의 로드무비에서 ‘정처없는 여정’에 담긴 상실, 소외, 환멸을 읽어낸 부분과 등장인물의 외적 여정과 내적 여정을 구분하여 분석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작가가 뉴 아메리칸 시네마 - 로드무비의 시대가 지나고 2000년대 미국에서 제작된 로드무비를 잘 ‘길들여진’ ‘착한’ (98p) 로드무비로 읽은 점이었다. 작가에 따르면 “<어바웃 슈미트>, <사이드웨이>, <미스 리틀 선샤인>, <다즐링 주식회사>, <네브래스카>, <와일드> 등에서 유랑은 결국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삶, 정주의 삶의 가치를 깨닫기 위한 하나의 수련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클리셰들의 지배에 스스로를 온전히 내맡기기 전에 잠시 취하는 한시적인 일탈에 지나지 않는다. 인물들은 유랑의 형식만을 차용한 그 뻔한 여정 속에서 마치 야성을 잃은 짐승들처럼 순응하며 착하게 길들여져간다.” (98p) 위에 언급된 영화를 모두 재밌게 별 문제의식없이 즐겼던 나로서는 작가의 이런 지적에 허를 찔린듯한 느낌이 들었고,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이에 반해 ‘길들여지지 않은’ 로드 무비로 2010년에 제작된 <믹의 지름길>이라는 영화를 소개한다. 여성 주인공의 대륙횡단을 다룬 영화라서 ‘페미니즘 웨스턴’ 이라고 소개되기도 한다는데 본인은 그러한 수식어가 적합해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개척 시대의 서부가 배경이지만, (여기서) 길은 결코 문명의 전파나 야만의 교화를 위한 통로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명사회로부터의 탈주를 위한 수단으로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 길은 그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조건일 수도 있다.” (100p) 이런 설명을 읽고나니 이 영화가 무척 보고 싶어져서 바로 검색해보았는데 국내 미개봉작이라 볼 수가 없다. 너무 아쉽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취향이 잘 맞고, 비슷한 삶의 경험이 있는 친한 오빠와 영화와 인생에 대해 죽이 척척 맞는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 본인의 사연과 소개된 영화와 얽힌 일화들을 듣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다. 이 책은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사람이 앞에 있는 것처럼 맞장구를 치고 혼자 빵 터지길 반복하며 즐겼다. 김호영 작가는 역마살 인생이라고 할 만큼 한군데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는데 나 역시도 유년시절부터 전학을 자주 다닌데다 성인이 되어서도 집에 가만히 있질 못하고 늘 떠돌아다녔다. 돌아보니 내 삶에도 로드무비의 한 장면 같은 순간이 꽤 많더라. 작가가 프랑스 유학시절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느낀 심정이 내가 뉴욕에 있을 때 느꼈던 것과 똑닮아서 타향살이가 주는 공통의 정서가 있구나 생각했고, 록이 로드무비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고 (122p) 했을 때는 격하게 동의했다. 갑자기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이 책은 ‘길’이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멋지게 마무리된다. 그러면서 사족으로 본인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된 계기를 밝히는데 알랭 들롱이 나오는 영화 <일식>(1962)을 보고 감동을 받은 탓이 크다고 했다. 나중에서야 이 영화가 이태리 영화인 걸 알게 되었다고... 여기서 난 정말 빵 터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백. “나를 먼 이국땅으로, 고달픈 유학생의 길로 떠나게 만들었던 그 감정.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그 달뜬 감정. 지금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인생은 때때로 오해에서 시작된다. 그런 채로 한없이 굴러가다가 우연히 멈춰 섰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실체를 보여준다.” (142p) 달콤쌉쌀한 맛이 나는 이 고백 앞에서 나는 가슴이 살짝 저몄다. 다름아닌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