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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Oct 15. 2019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니?!  고독이 시끄럽다는 독창적인 발상이 책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확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책 속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시끄러워도 이렇게 시끄러울 수 없는 고독함으로 가득한 하나의 세계가 펼쳐졌다.  



주인공 한탸는 지하실에서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하층민 노동자이다.  그가 하는 일은 압축기라는 단순한 기계를 반복적으로 조작하는 일이다. 지성이라곤 눈곱만큼도 필요하지 일인데 한탸는 매우 지적이다. 그는 더러운 폐지 사이에서 고전 명작에서부터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서들을 찾아내 읽고 읽고 또 읽고, 그것들로 자신만의 꾸러미를 만들어 소중히 간직한다. 그래서 그는 더러운 작업 환경과 술을 부르는 반복되는 고된 노동을 기꺼이 견디며 심지어 그 일을 좋아하기까지 한다.  집에서나 일터에서나 늘 혼자인 그는 책을 통해 배우고, 느끼고, 깨달은 것을 누구하고도 소통하지 못한다. 아무하고도 대화하지 못하기에 그는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혼잣말을 할 수밖에 없고, 그의 고독은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적인 열정과 술기운이 만들어낸 열기 속에서 그는 유명한 작가 못지 않은 자신만의 사상과 세계에 대한 해석을 읊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다. 오직 독자만이 그의 소리를 듣는데 안타깝게도 한탸는 우리들 (독자)의 존재를 모른다.  그는 종종위대한 철학자나 작가가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나 함께 대화를 나누는 환상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 진정한 만남의 기쁨을 느낀다. 



한탸의 안타까운 처지는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하는 다소 식상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한탸가 살고 있는 세계는 1960년대 공산주의 체제 하의 체코 프라하이다. 현대판 분서갱유가 자행되던 시절로 한탸가 일하는 작업장에 던져진 폐지 중에는 프로이센 왕실 도서관의 장서와 나치 문학, 그리고 사회주의 논리에 반대하는 금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책들이 전부 폐기되고 있는 것이다.  한탸는 금서를 읽으며 지적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그 성장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세계와의 아무런 접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자폐적인 지적 성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책을 읽어본 사람을 알겠지만 좋은 책을 만난 후의 감동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더 커지지 않나? 함께 읽는 행위는 개인과 집단의 실천적 변화를 불러오고, 나아가 사회 변화로 이어지는 법이다. 책 읽기의 목적이 반드시 변화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발전적 변화'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없는 곳에서 자기 안에서만 가능한 읽기란 가혹한 것이다. 그것은 유배요, 감금이다. 비록 한탸가 두 발로 집과 작업장을 오가는 통행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사실상 누구하고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 그는 유폐된 존재다.  그는 이런 생활을 35년째 하고 있다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또한 살아오는 동안 그는 줄곧 이별을 경험했다. 사랑하는 엄마와 삼촌을 잃었고, 첫 사랑은 어이없게 헤어졌으며, 사랑했던 집시 여인은 당국이 여인을 강제로 연행하는 바람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관계가 확대되기는 커녕 점점 축소된 것이다. 한탸의 삶은 개인에게서 자율성을 앗아간 삼엄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러나 제약이 모두에게 똑같이 족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산주의 사회 안에도 산업화의 물결은 밀어닥친다. 공장식 폐지 압축장이 들어선 것이다.  그곳을 방문한 한탸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책들을 압축해버리는 시스템에 압도당한다. 유니폼을 차려입은 공장의 인부들에게선 내면의 갈등이나 고뇌가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임금을 받고 휴가를 갈 생각으로 그저 즐거워 보인다.  자기들이 압축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전혀 관심이 없다.  세계 안에서 한탸가 느끼는 고립감과 소외감은 더 커진다.  그리고 마침내 한탸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작업장의 소장은 그를 해고한다.  어디 다른 곳에 있는 백지를 처리하는 업장으로 가라고 한다.  그가 35년을 어루만지며 한 몸처럼 일했던 압축기는 이제 생면부지의 젊은이들에게 넘어갔다. 한탸는 압축기에게 배신감을 느낄 지경이다. 이런 일들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진다.  자신만의 책꾸러미를 만드는 일이 유일한 삶의 기쁨이었는데 그 마저도 빼앗긴 갓이다.  이 세계에서 한탸가 설 자리는 없어보인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순응? 안 될 말이다.  한탸는 책들과 한 몸이 되기를 원한다.  그는 압축기 안으로 책들과 함께 들어간다.  



이 작품은 아주 짧은 분량의 우화적인 느낌의 소설로 밀폐된 공간에서 주인공의 은밀한 기쁨이 자아내는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허나, 자폐적인 독백이 장광설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 무엇보다 공산주의 독재체제에서의 압박이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 않아서 몰입하지 못한 면도 있다.  시대가 독재보다는 테러를 더 두려워하는 시대로 바뀐 탓일까? 한탸의 고독에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나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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