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로 입성
코끝이 찡해오고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추위 속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서 있었다.
하필이면 어둠이 길고 연일 비가 내리던 때, 잿빛 하늘 아래 차가운 공기는 우리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우리가 독일에 왔다고?”
장장 12시간의 비행 끝에 설렘을 안고 도착한 독일의 날씨는 축축하고 꿉꿉한, 비행기에서 막 내린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린 지 8개월 만에 우리는 독일에서 다시 한번 우리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독일행이 결정되고 도착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단숨에 진행되었다.
당근이 성행하지 않던 시절 아직 새것처럼 반짝이던 우리의 신혼살림은 곧장 중고나라를 통해 헐값에 팔렸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건 인심 쓰듯 무료 나눔을 하기도 했다.
아무리 합리적인 소비로 신혼살림을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가슴 한편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독립 후 빌트인 된 5평 남짓 원룸에 살다가 신혼집에 대한 환상을 품고 직접 발품까지 팔며 고른 ‘첫 가구’와 ‘첫 가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쉬워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독일로 떠나기까지 겨우 한 달 남짓의 시간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달 후 우리 손에 들린 건 단출한 이민 가방 하나뿐이었다.
독일이라는 나라는 남편에게 의미가 컸다.
지금의 ‘기계 덕후’인 남편은 여느 또래와 마찬가지로 어릴 적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다.
어느 날 아버지께 받은 자동차 잡지를 접한 후,
‘독일은 자동차를 잘 만드는 나라’라는 인식을 갖게 됐고, 그때부터 마음속에 독일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품게 됐다.
그리고 '언젠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모터쇼에 가보자'라는 꿈을 실현시키기까지 20년이 걸렸다.
'해외 살이'에 대한 로망에 불을 지피게 된 계기는 신혼여행지였던 아이슬란드에서였다.
우리는 입이 ‘떡’ 벌어지도록 ‘헉’ 소리 났던 위대한 자연을 보고 그 분위기에서만 뱉을 수 있는 낭만 섞인 말로 ‘언젠가 이런 곳에서 살아 보자!’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나눴다.
반짝반짝 빛나던 그의 눈동자와 우리 주변을 부유하던 그날의 공기까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유학은커녕 단기 어학연수조차 경험 없던 우린 그렇게 생면부지의 유럽 땅에 매료되었다.
당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일주일
소위 링로드라 불리는 아이슬란드 한 바퀴를 돌아보기엔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 광활한 자연을 앞에 두고 시간에 쫓겨 잰걸음으로 다니는 여행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슬란드의 절반은 포기하고 대신에 눈에 꾹꾹 담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나머지 절반은 다음에 다시 이곳으로 향할 수 있게 여지를 남겨두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서 그때의 아쉬움은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았고 결국 불씨가 되어 지금 우리가 독일에 있게 된 계기가 됐다.
7년 간 몸 담았던 회사를 떠나야 했다.
회사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사람에 대한 애틋함은 남아있었다.
워낙 좋은 동료들과 일한 덕에 그들과 헤어지기란 쉽지 않았다.
퇴사 날, 동료들의 배웅을 받으며 미련 뚝뚝 떨군 채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아이러니하지만 가장 행복한 날이기도 했다.
이유는 퇴사 후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낮맥(낮에 먹는 맥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전에 퇴사 후 나의 로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곧장 카페로 달려갔다.
그리고 현재 나의 상황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카페로 달려갈 수 있는 그때와 다를 바 없다.
안타깝게도 나는 6년째 무직인 상태로 나무에 더부살이하는 이끼처럼 남편에게 기생하고 있다.
언제든 낮맥을 할 수 있고 낮잠도 가능하며 심지어 하루 종일 뒹굴러도 뭐라 할 사람이 없지만,
이 정도로 무쓸모한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종종 나를 괴롭힌다.
30대 초반, 가진 것을 버리고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언어를 새롭게 배워야 한다는 부담감과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을 놓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그리고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서 겪을 고충과 편견의 시선 또한 감내해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의 우리에겐 두 주먹 가득 움켜쥐고 놓칠까 봐 전전긍긍한 건 없었다.
단지 우리가 쥐고 있던 건 남편과 나, 서로를 향해 맞잡은 두 손과 서로의 퇴직금이 전부였다.
가진 게 없다고 두려운 마음까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냈다.
거창한 미래를 기대하지도 허황된 꿈을 꾸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변곡점을 맞이할 때라고만 생각했다.
우리는 회사와 집만을 오가며 콧바람 한 스푼 끼얹던 생활에서 벗어나 마음껏 여행하며 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여행과 사진을 좋아하는 우리에겐 유럽의 교통 요충지인 독일이 최적이었고, 남편에겐 꿈이자 나에겐 기회의 나라였다.
물론 지금의 내 모습은 남편에게 더부살이하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언젠가 나도 이곳에서 떳떳하게 비상할 날이 오리라 믿는다.
누군가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며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은 어차피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고, 그에 따르는 책임은 본인이 지면 될 뿐이다.
그리고 난 그 책임을 지기 위해 오늘도 분주하게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