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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또개 Nov 26. 2023

독일에서 자발적 고립

첫 번째 우리 집

독일에서 첫 번째 집은 집의 구조상 세상과 단절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민 간의 소통도 거의 불가능했고 우리도 소통할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호기롭게 선택한 이민이었지만 막상 와서 겪어보니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대로는 오랜 고립 생활로 마음의 문이 꽉꽉 닫칠 것만 같아 나를 둘러싸고 있던 껍데기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독일에서 우리의 첫 집은 폐허나 다름없어 보이는 외관을 가졌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리모델링해 놓은 곳이었다.

당시에 우리 집에 방문했던 지인들은 추레한 겉모습에 놀라고 드라마틱하게 변주된 내부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들 얼굴에 드러난 당혹스럽고 걱정스러운 표정은 이내 안도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 집에 우리가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비자도 없던 시절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준 집주인 때문이었다.

독일에서 집을 구할 때는 근로계약서와 3개월 간 입금된 급여 통장이 필요하다.

이것만 있다고 당장 집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면접을 본 후 집주인으로부터 간택당해야 한다.

독일은 세입자를 함부로 내보낼 수 없도록 세입자 보호법이 잘 되어있기 때문에 집주인 입장에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남편은 독일에서 직장에 채용된 상태였지만, 비자가 나오지 않아 바로 일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겐 증명할 서류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집주인과의 면접에서 번번이 탈락됐고 여러 번 좌절의 맛을 보다가 지금의 집주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두 번째 집 역시 첫 번째 집주인과 동일하다)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던 건 앞서 그 집을 본 세입자 후보 여러 명이 놀란 가슴 부여잡고 도망친 덕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당시에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고 구세주나 다름없던 집주인은 친절했다. 우리는 그 집을 마다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사실 당시의 우리 집은 ‘이런 곳에 사람이 살까?’ 의문을 갖게 만드는 집이었다.

듬성듬성 이 빠진 것처럼 여기저기 갈라진 나무 대문을 통과하면 ㄱ자 형태로 된 오래된 3층 건물이 우뚝 서있었다.

그 낡은 건물 끝자락에 이질 된 모습으로 리모델링된 현관문 하나가 눈에 띄었다.

현관문이 없었다면 그냥 창고로 착각했을 바로 그 집에서 우리는 3년 가까이 살았다.


부동산 사이트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겉모습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집주인과 다 쓰러져가는 대문을 통과하면서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사실 집주인에게 간택당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최대한 상냥하게 웃고 있던 내 얼굴과는 다르게 마음속은 크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아냐, 여기 아닐 거야. 에이 설마. 왜 거기로 들어가? 아니잖아. 아니라고 말해줘!!!'


하지만 두 다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문턱을 넘고 있었고 그 너머엔 겉모습만 보고 속단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깔끔한 자태로 꾸며져 있었다.

진흙 속 진주를 발견한 것처럼 내 얼굴에도 금세 화색이 돌았다.

현관문을 열고 두세 계단 내려가면 부엌, 거실, 안방, 안방에서 다시 세 계단 오르면 서재로 통하는 길이 마치 미로처럼 되어있었다.

집은 반지층의 형태를 띠었지만 완전히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집은 아니라 빛도 충분히 들었다.

무엇보다 독특한 구조 덕분에 생활하는데 재미가 있었고 아주 작은 크기였지만, 둘이 살기엔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나는 우리 집에서 한평 남짓한 크기의 서재를 좋아했는데 남편이 출근하면 그 작은 박스는 내가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영상도 만들 수 있는 나만의 작은 놀이터가 되었다.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공간은 바로 테라스로 통하는 곳이기도 했다.

서재에서 바라본 테라스는 오히려 아담해서 좋았다.

하루종일 집에서 자발적 고립을 즐겼던 나는 느닷없이 출몰하는 불안한 생각들로 감정이 널뛸 때가 있었는데

그나마 작고 소중한 테라스가 있어서 불길하고 불편한 감정들을 해소할 수 있었다.

테라스는 테라스답지 않게 사방이 막혀 있어 푸르른 자연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안에 있으면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식물을 들여놓은 이후로는 나만의 비밀정원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 안에서 내가 뭘 하는지 유일하게 볼 수 있던 존재는 하늘 위의 새들뿐이었다.

가끔은 건조된 빨래 위로 흩뿌린 똥 때문에 헛수고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지금 있는 집은 개방된 발코니라 미관을 중요시하는 이곳에서 빨래를 널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의 테라스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새싹이 움트고 온 세상에 푸른빛이 돌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햇살 샤워를 하기도 했고,

한 여름밤에는 수놓은 밤하늘 아래서 남편과 둘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시원하게 비가 내린 후에는 촉촉이 젖은 풀냄새를 맡기도 했고 겨울에는 소복이 쌓인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단어를 늘어놓고 보니 꽤나 낭만적이게 들리겠지만, 평범한 일상 속 어쩌다 발견한 나날들이었고 그 이면 속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다.


특히 태풍이라도 부는 날이면 사방에서 날아온 온갖 것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우리 집 식물들이 엎어지며 쏟은 흙으로 테라스에 벌창을 만들어 놓는 건 예삿일이고, 낙엽과 쓰레기는 애교로 옆집에서 널어놓은 빨래, 심지어 무거운 파라솔까지 날아온 적도 있었다.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흡사 고물상과 같아 나중에는 무념무상으로 수집하는 재미도 있었다.


게다가 서재 바로 옆 건물이 공용 세탁실이었는데 샵인샵을 연상케 하듯 그 안에는 작은 Bar가 있었다.

그곳은 하우스마이스터(Hausmeister)라 불리는 아파트 관리인의 아지트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하우스마이스터가 하는 일은 주로 건물 유지관리 및 보수, 청소, 쓰레기 처리까지 다양하다.

우리 건물의 하우스마이스터는 이곳에 살면서 본인의 아지트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그의 아지트에는 온갖 종류의 술이 가득했다.

그 Bar는 줄곧 오후 3시쯤 문을 열어 밤 10시에 닫히곤 했는데 그 말인 즉 일찌감치 일을 마친 그는 7시간 동안 음악을 틀고 여러 사람을 초대해 주야장천 술을 마신다는 얘기다.


독일에는 루헤차이트(Ruhezeit)라고 해서 정해진 시간 동안 아파트에서도 소음을 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야 하는 규칙이 있다.

보통 밤 10시부터 아침 7시까지 낮 1시부터 3시까지는 소음을 내서는 안된다.

우리의 하우스마이스터는 이 규칙은 철저하게 지켰지만 가끔 Ruhezeit을 침범해 소음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필이면 우리 집과 그의 아지트는 맞닿아 있던 곳이라 그 소음은 더 크게 들렸다.

그가 술이라도 취하는 날엔 목소리가 점점 커져 바로 내 귓전에 대고 떠드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평화로운 아침이면 근처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로 마음이 고요해지곤 했는데 오후만 되면 이 고요함이 바사삭 깨져 참기 힘든 날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의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백색소음처럼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그의 아지트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는 날이면 빨래 바구니를 허리에 끼고 세탁실을 기웃거리는 내 모습에 흠칫 놀라기도 했다.


"오늘 마티아스 아픈가 봐!"


"그러게? 오늘 조용하네?"


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시시콜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걱정하는 날도 있었고 항상 우리에게 안부를 물으며 먼저 손 내밀어준 게 고마워 어떤 날은 한인마트에서 사 온 부드러운 한국 빵을 나눠주기도 하고 내가 감자를 튀겨주면 남편은 술안주로 들고 가 맥주 한 잔 얻어먹고 오는 날도 있었다.

한국에 다녀오던 길이면 전통주를 선물로 건네기도 했는데 그 고립된 생활에 그나마 독일이라는 곳에 의지가 됐던 건 그의 역할도 크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그 집에서 나오던 날 그는 아쉬운 얼굴 한가득 내비치며 잘 가라고 배웅해 줬다.

우리가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어도 우리만큼 그도 많이 아쉬워하고 있구나 느낄 수 있었다.






가끔은 서울의 밤공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시원하게 마시던 맥주가 생각나는 날이면 우리는 테라스에 앉아 그릴에 고기를 구웠다. 그러면 그곳은 홍대 고깃집도 됐다가, 시원한 밤공기를 누릴 수 있는 한강 둔치가 돼주기도 했다.

화려한 조명은 없지만, 하늘에 수놓은 별이 가득했고 왁자지껄하진 않지만, 고요함이 가득한 그 안에서 우리 부부는 반석처럼 견고해졌다.


나의 고립된 생활은 비단 폐쇄된 형태의 집 때문 만은 아니었다.

나는 비로소 단단해진 마음을 갖고 문 밖으로 나갈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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