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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또개 Nov 30. 2023

이제 나에게도 친구가 생기는 건가?

두 번째 우리 집

“얼마나 남은 거지?”


“두 번만 더 왕복하면 될 것 같아.”


달그락달그락 이삿짐을 실은 밀차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이삿짐이라고는 고작 몇 개의 박스가 전부라 손잡이도 없는 작은 밀차에 실어 짐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굉굉한 밀차 소리가 고요한 동네를 깨우는 것만 같아 혼자 얼굴이 시뻘게졌다.


차에서 짐을 내려 현관문까지 이동한 거리는 고작 10미터 안 팍의 짧은 거리였지만, 오르락내리락 몇 번의 왕복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누군가 창너머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단 섬뜩한 기분이 들어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독일에서 우리의 첫 번째 집은 가전, 가구 심지어 인터넷까지 갖춰져 있던 집이었다.

덕분에 처음 정착할 땐 금전적으로 큰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반면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독일의 모든 집이 그러하듯 전등까지 내 손으로 직접 달아야 하는 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주방기기는 내장돼 있어 설치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다.

독일에서 이사할 땐 주방기기마저 없는 깡통집이 흔하기 때문에 흰 도화지에 색을 채워 나가듯 하나하나 손봐야 한다.

그리고 이사할 땐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려놔야 한다.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러한 번거로움 때문이라도 독일에서의 이사가 꺼려졌지만, 우리는 워낙 협소한 공간에서 지내기도 했고 이젠 틀에 박힌 곳에서 벗어나 우리의 애정이 담긴 공간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무엇보다 독일에 온 지 3년 만에 나도 주민과 소통이라는 걸 해 볼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우리는 직접 고른 물건들로 우리만의 공간을 채워 나갔고 전보다는 좀 더 집다운 집에 살게 되었다.

해가 오후 느지막이 한 곳만 집중적으로 들어왔던 이전 과는 다르게 이제는 집안 곳곳으로 강렬한 빛이 모여든다.

이전 집의 테라스는 사방이 막혀 우리만의 비밀 아지트 같은 느낌이 있었다면 이제는 탁 트인 시야로 때마다 옷을 갈아입는 자연이 보이고 저마다의 사연을 쥔 채 거리를 분주하게 다니는 사람들도 보인다.

처음에 이사 왔을 땐 개방된 이 집에 적응이 안돼 오히려 숨고 싶었다.

뻥뻥 뚫린 발코니 사이로 남들 시선이 두려워 싸리나무를 감싸 울타리를 만들기도 했는데 아파트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해체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마음의 문을 열겠다고 이사를 결심했는데 나는 다시 그 문을 걸어 잠그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열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자신감 있게 내뱉지 못한 독일어 탓도 있었겠지만 자체 고립 생활로 좁아진 행동반경만큼 나의 사회력 또한 줄어있었다.

이웃을 마주칠 때면 형식적인 인사 뒤에 어떤 말을 덧붙이지는 않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어 후다닥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덜됐을 때 하필 코로나 19 마저 터져버렸다.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기도 전에 다시 빗장을 질러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내향형인 우리 부부는 이 시간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우리뿐만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상황이라는 게 위로가 될 때도 있었다.


코로나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질 때즈음 우리도 외출하려고 밖으로 나선 날이었다.

그때 차 배터리가 방전돼 있었고 급한 대로 근처에서 점프 스타터를 구입했지만, 배터리를 충전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용량이었다.

우리는 고민 끝에 이웃집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거의 3년 만에 처음으로 옆집 문을 두들겼지만, 곧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야? 우리 코로나 걸렸어”


하필 도움을 요청한 곳이 바이러스가 창궐한 곳이라니...

알겠다. 괜찮다며 돌아서는데 문이 열렸다.


우리의 모습은 헤드폰만 안 썼지 마치 고요 속의 외침을 연상케 했다.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마스크에 가려진 각자의 언어를 이해하려 노력 중이었다.


혹시나 점프 케이블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온 건데 아쉽게도 그들에겐 없었다.

비록 수확은 없었지만 아픈 와중에 도와주려고 애썼던 그 마음이 고마웠다.

반대로 나였다면 귀찮아서라도 집에 아무도 없는 척 초인종 정도는 가볍게 무시했을 거다.

나는 그들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손편지와 함께 녹찻잎을 사서 그 집 문고리에 걸어 두었다.


그렇게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르고 늦은 여름, 아파트에서는 그릴 파티가 열렸다.

그때 이미 독일은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활보하고 다닐 때였다.

아직은 조심스러웠지만 그동안 갇혀 지낸 세월이 답답했는지 생각보다 주민들이 많이 모였다.

나는 주민들에게 선보일 김밥을 분주하게 말면서도 참석 직전까지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적 고민이 많았다.

여전히 자신 없는 독일어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니면 더 이상 기회는 없겠다는 생각에 남편과 나는 한 손엔 김밥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문 밖을 나섰다.


우리에게 녹차와 카드를 받았던 이웃은 그날 파티에서 고마움을 전했다.

작은 호의였지만 누군가에게는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오랜만에 느꼈다.

그날 이후로 물꼬를 튼 우리는 서로의 집에 초대돼 몇 번의 식사 자리를 가졌고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기념품을 챙겨주기도 했다.

어쩌다 내가 말문이 막혀 당황하면 그녀는 느긋하게 기다리며 다독여주었고, 독일어 때문에 애먹는 나를 위해 대화 상대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을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따수운 나의 첫 번째 외국인 친구가 생겼다.






이 집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벌써 4년이 막 지났다.

나는 여전히 독일어가 어렵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긴장돼 급 피로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동안 우리의 삶은 많이 변했고 우리가 바라던 대로 이곳에 잘 녹아들고 있는 것 같다.


20대 초반엔 기백이 넘쳐 거침없이 달려들곤 했는데 지금은 해가 거듭될수록 두려움의 크기도 비례해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이런 상황에 열패감도 들지만, 이 또한 다음 스텝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온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 선택한 곳이니 나의 삶의 모토인 'Coraggio e avanti'라는 말처럼 용기를 갖고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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