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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동그란 Dec 29. 2021

초라하고 초조했던 공기업 취준생

신(神)의 직장을 찾아서 1탄



내가 올바로 서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미 기울어진 땅에서는 바르게 서 있을 수 없었다. 


 신(神)의 직장이라는 공공기관에(엄밀히 따지면 시 산하 출자출연기관) 입사한 건 2018년 12월 27일이었다. 그것도 운 좋게 예비 1번으로 말이다. 그러나 2021년 12월 27일 정확히 3년째 되는 날, 마음의 병이 너무 커진 나는 병가를 냈다. 병가가 끝난 뒤 나는 더 이상 나를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사직서를 낼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신(神)의 직장을 경험하지 못했고, 신(辛)의 직장에서 매운맛만 보았다. 병가를 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는 왜 지독하게도 공공기관을 가고자 하였는지 반추하는 것이었다. 




치열함 - 첫 번째 공공기관 취준생 시기


 내가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 때 이미 내 주변엔 대학생활을 하던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엄마고, 다른 한 명은 9남매인 어머니의 막냇동생인 이모셨다. 엄마는 40대 중반, 이모는 30대 중반이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셨다. 당연하게도 늦은 나이에 시작한 만큼 여유가 없었던 두 사람은 치열하게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대학에 진학하기도 전 캠퍼스 로망을 기대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는 지운만큼의 압박감이 엄습했다. 오로지 학점을 받는 것과 취업에 유리할 것 같은 대외활동만 골라했다. 대기업, 공기업 대외활동을 골고루 해봤는데, 기업의 직원이 "우리 회사 정말 여자에게도 괜찮아, 준비해서 꼭 들어와"라고 말한 곳은 공기업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때도 공기업을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대외활동을 했던 대한주택보증(현 주택도시보증공사)이 가고 싶었고 거기가 공기업이었던 것이다.


 준비하던 기업에 맞춰 필기 공부에만 몰두했다. 필기만 통과하면 무조건 붙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자만이었고 결과적으로 최종면접에서 떨어지자 멘붕이 왔다. 당시 스물네살로 면접스터디를 하면서 "스물네살이면  진짜 어려요, 너무 부러워요"라는 말을 듣고 잔뜩 교만해져 있던 나는 "불합격"이 미치도록 견디기가 힘들었다. 나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고 싶음과 동시에 나의 초라함을 숨기고 싶어서 산업은행 인턴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초조함 - 산업은행 인턴


 그러나 오히려 이게 독이었다. 내가 합격한 곳은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국책은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의 눈은 높아졌다. 당시 내 수준과 스펙은 턱없이 부족한데 학벌 좋고 스펙도 빵빵한 인턴 동기들을 보면서 그들이 내 수준인 줄 알았다. 인턴이 끝나기 전에 동기들은 하나, 둘씩 취업에 성공했고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인턴이 끝나고 나서 까지 취업을 못한 나는 급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고 내 초라함을 직면한다. 그리고 사람인을 통해 막무가내 취업지원을 한다. 아무도 취준생인 나를 보채는 사람도 없고 무시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직장인이 되어야만 내 가치를 인정받기라도 하듯이 취업이 하고 싶었다. 


 공공을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으로 실패도 포장하며 여자로서도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공기업에 대한 집착이 시작됐다. 협회는 다 지원했다. 사람인으로 지원한 곳들은 면접 성공률은 좋았다. 그럴싸한 자기소개서와 보여주기 식 자격증들로 지원한 협회들 모두 면접까지 갔다. 하지만 정규직의 벽은 높았고 진정성 없는 내 모습이 면접에서 계속 떨어지게 만드는 요인들이었다. 간신히 최종 합격하게 된 곳은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협회에 본사도 아닌 지역 사무국에 계약직이었다. 



초라함 - 중소기업 지원 협회 계약직


 그곳은 무려 3명의 직원이 동시에 그만둔 곳이었고 전 직원 3명을 다시 뽑았고 그중 한 명이 나였다. 인생 첫 출근 날, 지회 회장님이 청소를 시키셨고 선견지명이 있었던 한 명의 직원이 다니지 않겠다고 말하며 출근 2시간 만에 퇴사했다. 그분은 진정한 일류였다. 인생 첫 직장에서 나는 혜안이 없었고 삼류였다. 입사 동기인 국장님과 단 둘이 남았다. 


 전 직원이 동시에 그만두면서 4주의 공백이 있던 곳에서 3명이 하던 업무를 단 2명이 했고 사회생활 경험 전무했던 나는 인수인계, 신입 교육도 없이 그 야생에서 버텨야 했다. 그 시절에 난 축복과 불행은 공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남아있던 사수는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미국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그분은 지식만큼이나 인품이 아이비리그였고 일자무식인 나를 이끌어주며 키워주셨다. 그래도 아무 이유 없이 임원들에게 미친 X라는 욕을 듣는 것과, 하루에 100통이 넘는 전화민원을 상대하면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힘들었다. 사람도 사계절을 겪어야 제대로 알 수 있듯이, 1년만 꾹 참고 다녀보라는 국장님의 다독임과 이끌어주심 덕분에 1년 3개월을 다니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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