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동그란 Dec 30. 2021

다음 중 업무를 가장 비효율적으로 하는 법을 고르시오

신(神이 아닌 辛)의 직장, 공공기관 1탄

"잠겨 죽고 싶지 않은데 일은 내게 물처럼 밀려와"


 나는 단순히 공기업을 준비하면서 경영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입사 시험 과목을 경영학으로 응시했고, 회사에서 내가 처음으로 맡게 된 업무는 회계였다. 첫 직장에서 전임자가 주고 간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내게 물처럼 밀려오라”라는 이정하 시인의 시구절을 딴 캘리그래피 때문인지 나는 항상 잠겨 죽어도 좋을 만큼 일복이 있었다. 어느 회사에서나 업무량이 많았는데 이 직장에서 맡게 된 회계 업무 또한 그랬다. 전공과 상관없는 업무였지만 운 좋게 자율성을 존중해주시는 팀장님과 회계에 능통한 사수 밑에서 많이 배우고 잔잔한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보냈다. 회계업무는 분명 전문성이 있는 업무인데 이 회사에서는 굉장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비효율 - 7년 만에 업무상 방문한 은행 영업점


 그도 그럴 것이 회사에 온라인 뱅킹을 처음 도입한 년도가 2020년이었다. 신산업을 발굴하고 지원한다는 회사에서 온라인 뱅킹은 회계직원이 실수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도입하지 않았다. 나는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스무 살 이후로 처음으로 은행 영업점을 직접 가야 했다. 은행 출금전표를 쓰는데 2시간, 팀장님이 법인인감 찍느라 1시간, 바쁜 날 가면 은행에서 대기하는 시간 1시간, 은행 직원이 일일이 하나하나 출금하고 입금하는데 걸리는 시간 1시간, 도합 5시간이 넘는 시간을 온전히 은행 업무만 했다. 


 이런 연유로 회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업무는 한정적이었고, 급여 계산 4대 보험, 세금신고 업무 등 회사에서 필요한, 회사 운영에 대한 ‘지원’ 업무를 하고 있어도 사람들이 보는 나의 모습은 은행 출금전표만 수기로 작성하고 있는것 이었다. 이 회사의 탁월한 점은 ‘가스 라이팅’이었다. 은행 창구업무의 비효율성에 대해서 1년 가까이 말했으나 <출납 업무시 금융시스템 도입 계획(안)> 결재 문서는 늘 보류 상태였다. 2020년, 때마침 터진 코로나 때문에 대면 업무의 위험성을 강조해서 마침내 온라인 뱅킹을 도입할 수 있었다. 


 비단 은행 창구업무 말고도 간신히 MZ세대에 껴있는 내가 생각할 때에 비효율적인 일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개선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선 주장을 내세웠다. 왜냐, 직장에서 제일 중요한 건 근로자 업무환경의 개선이고 이를 통해 조직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전 직장들에서는 항상 나의 요구사항들이 작은 부분이라도 반영되거나 반영되지 않는 부분은 상사가 납득할 만한 회사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을 해줬기 때문에 나는 말을 해도 되는 줄 알았다. 


 업무를 정말 빨리 한다는 칭찬을 어느 직장에서나 들었던 나는, 내 요구들을 통해서 분명히 조직에 개선된 부분도 있었는데 이런 내용들은 하나도 인정받지 못했다.


보수적인 직장에서 이런 내 모습은 당연히 예민하고 불만만 많은 직원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전 03화 매운맛 가득한 신(辛)의 직장, 공공기관(출자출연기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