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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임문학관 Dec 23. 2019

잠옷만 입고 나갈 순 없잖아

일상의 보편적 가치들을 게임에 담는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가 살아오면서 습득한 고정관념과 일반 상식에 따라 우리는 움직인다.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우산을 쓴다던지, 장갑은 손에 끼고, 신발을 발에 신는다는 일반적인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밥을 먹고,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루 일과에 나선다. 추우면 옷을 껴입는다. 문이 있으면 문을 열어서 들어가고, 가던 길에 물웅덩이가 있으면 피해서 간다. 이러한 일상생활의 일반적인 의식이나 관념을 게임에 적용시키는 건 어떤 모습일까?


게임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마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



<레지던트 이블 6>를 신나게 플레이하던 가마수트라(Gamasutra) 소속 기자 브랜든 쉐필드(Brandon Sheffield)는 자신이 조종하는 캐릭터는 좀비도 때려잡는 터프 가이인데, 위 스크린샷에서 보이는 작은 언덕을 넘지 못하는 것이 말도 안 된다며 SNS를 통해 우스갯소리로 불평했다. 이것 외에도 좀비들은 창문을 통해서 잘 기어 나오는데 왜 나는 창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가 하면, 좀비의 다리를 계속 짓밟으면 가만히 있는 머리가 터진다거나 하는 일반 상식을 위반하는 게임 속 메커니즘이 우습다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메커니즘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일반 상식 탈피 현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조그마한 언덕을 넘지 못한다고? 아, 그럼 게임 개발자가 그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거겠지. 언덕을 오르지 못한다고 해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게임 메커니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설정을 해둔 거구나. 이건 우리가 당연히 이해해야지. 아, 창문을 통해서 가지 못한다고? 게임 속에 있는 창문을 일일이 들어가려면 모든 창문을 들어갈 수 있게 개발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시간과 자원이 아까워서 안 해둔 것이겠지.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까. 다리를 때리면 머리가 터진다고? 그럼 뭐 어때. 터졌으면 됐지!


상식 따위... 없으면 어때?


문학 용어 중 불신의 자발적 유예(suspension of disbelief)라는 말이 있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사무엘 쿨러리지(Samuel T. Coleridge)가 처음 고안한 용어인데, 이것은 즉 독자가 읽고 있는 이야기가 아무리 환상적이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라 하더라도 독자가 스스로 이야기를 즐기기 위해 현실성을 배제하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 벌어져도 독자는 이야기를 읽는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머릿속에서 작용하는 불신을 억제하게 된다. 그 편이 더 재밌기 때문이다. 드래곤이 나타나서 불을 쏜다면, 아무리 우리가 현실적으로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이야기의 몰입을 위해 드래곤의 존재를 믿어준다는 것.


Willful suspense of disbelief, 2012, encaustic collage, Miranda Lake


이 법칙은 영화와 미술은 물론 게임에서도 적용된다. 게임 속 메커니즘이 현실과 동떨어져도, 게이머는 게임의 시스템에 이미 익숙하고 게임의 세계에 이미 몰입을 해버렸기 때문에 그대로 믿어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상식이나 고정관념을 벗어난 일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수준이 점점 발전함에 따라 게임 개발자들도 현실적인 디테일을 최대한 포함하려고 노력하는 추세다. 그래서 물리학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엔진이 계속 개발되는 것이고, 무엇이든 가능하게 해주는 샌드박스형 게임들의 인기가 계속되고, 실제 사진처럼 보이는 그래픽에 대한 욕망도 끊이질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적인 디테일로 게임을 꽉꽉 채우면 그것이 게이머들에게 큰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완성도 높은 게임이 될까?


여기서 게이머가 인지하는 '상식과 고정관념'이 게임에서 통하지 않을 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한 번 살펴보자. <젤다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를 처음 해본 어느 북미 게이머가 아마존에 이런 리뷰를 남겼다:



별 다섯 개 중에 달랑 한 개만 줬다.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신들의 트라이포스에 엄청난 혹평을 한 것이다. 도대체 왜? 그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번역을 하자면 이렇다.


지루하고 재미없네요. 다신 이 게임에 손도 대지 않을 겁니다!

뭐, 제 잘못일 수도 있겠네요. 저는 패미콤으로 출시된 오리지널 젤다의 전설을 아주 즐겁게 했어요. 너무 재밌었고, 그 게임을 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보냈죠. 그래서 신들의 트라이포스가 출시된다고 들었을 때 무지 신났습니다. 하지만 시작한 지 4시간 만에 과감하게 때려치웠습니다. 휴. 왜 그랬는지 설명을 해드리죠.

우선 게임의 오프닝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16비트 그래픽으로 아름답게 랜더링 된 컷 씬도 너무 좋았고, 하이랄의 세계에 푹 빠져들게 만드는 매혹적인 연출이었어요. 정말 최고였습니다.

게임은 링크의 시점으로, 링크 삼촌 집에서 시작됩니다. 링크가 잠에 깨면서, 싸움을 하러 준비하는 삼촌을 보게 되죠. 삼촌은 무기와 장구류를 갖추고, 집에 나서기 전에 링크한테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집에서 절대 나가지 마라' 면서 떠납니다.

몇 분이 지납니다. 또 몇 분이 더 지납니다. 삼촌은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했죠? 그래서 침대에 내려와서 집구석 이곳저곳을 탐색하기 시작했어요. 너무 지루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삼촌집 찬장에 있는 항아리 몇 개를 가지고 놀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침대 옆에 제가 손으로 들 수 있는 항아리가 있었죠! 근데 던지니까 금방 깨지더군요. 삼촌이 돌아오면 꽤 화낼 것 같았습니다. 뭐, 돌아오기라도 하면 말이죠.

휴. 그리고 전 그 이후로 3시간 반이나 더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닌텐도를 꺼버리고 게임을 되팔았어요. 닌텐도,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가요? 아니, 게이머를 집 안에 가둬놓고 도대체 무슨 게임을 하라는 거죠? 집 안에서 뒹구는 것이 당신네들이 생각한 '모험'입니까? 그리고 삼촌은 도대체 뭐죠? '다시 돌아온다'구요? 아니, 지금 게임을 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아버지상에 버림받는 기분을 가르치려고 하는 거였어요? 삼촌은 링크를 그냥 버리고 갔다고요!!

전 다시는 이 게임을 하지 않을 거예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리뷰를 읽고 '설마,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한 거야?' 라며 분명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장난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 삼촌이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해서 그냥 집에 있었다고? 그것도 4시간 동안이나? 신들의 트라이포스는 주인공 링크를 조종하는 게이머가 삼촌의 말에 거역을 하고 집 밖을 나서야 비로소 시작이 된다. 한마디로, 어른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의 반항심에서 게임이 출발한다는 것이다. 물론, 링크가 잠든 사이에 젤다 공주가 구해달라는 메시지를 텔레파시를 통해 보내지만, 아니, 지금 당신이 어린아이라면 꿈에서 들은 망상 때문에 삼촌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나설 텐가? 그런 의미에서 이 리뷰어는 게임이 부여한 역할을 순수하게 이해하고 자신의 상식과 고정 관념을 게임에 투영한 케이스다. 보통 게이머라면 삼촌의 말 따윈 귀 기울이지도 않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게임 고정관념'을 토대로 게임을 진행했을 것이다. 젤다 공주의 부르심이 없어도 똑같았을 것이다. 우선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게임에 익숙한 사람들이 할 첫 번째 행동이다.


하지만 이 리뷰어는 순수하게 링크라는 한 소년과 자신을 완벽하게 동일시했고, 링크의 역할을 자신의 해석으로 수행해낸 것이다. 리뷰어는 어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히 링크의 역할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렇게 행동으로 옮겼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가치이며, 당연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잘못된 게임 플레이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RPG, 즉 역할 수행 게임(role playing game)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리뷰어는 철저하게 링크의 입장에 서서 게임을 진행했고, 다소 기가 막힌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이것이 설령 장난일지언정).


게이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게임 속에서 적용되는 '게임 고정관념'이 있다. 줄여서 '게임관념'이라고 칭해보겠다. 이 게임관념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상식과 고정관념에 따라 여러 일반화된 패턴을 자연스럽게 따르듯, 게임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어느새 게임의 메커니즘에 익숙해져서 게임 속 여러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수행해나가는 게이머만의 일반적인 패턴을 일컫는 것이다. 이것은 게임에 익숙한 사람들만이 갖게 되는 일종의 게임 상식으로, 게임의 대사가 길면 스킵 버튼을 연타하거나, 막힌 길이 있으면 알아서 돌아간다거나,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 있으면 알아서 받아들이는, 다시 말해 게이머들만의 극도의 불신 유예(suspension of disbelief)이자 고정된 습관이다. (단지 불신 유예만으로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게임에 대한 이러한 고정된 관념이 단순한 스토리 수용성을 넘어서서 시스템, 패턴, 환경, 장치, 진행 과정 등을 전부 능숙하게 피해 가는 포괄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임관념에 익숙한 사람들은 신들의 트라이포스를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시작할 수 있었고, 게임관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삼촌의 말을 거역할 정도의 반항심이 있는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게임관념이 몸에 배어있었기에 신들의 트라이포스를 아주 재미있게 플레이했고, 삼촌의 말 따윈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런 게임관념이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삼촌의 말을 거역하기 싫어하는 나름의 보편적 가치를 아예 무시하는 것보다, 게임에 어느 정도 경험의 보편성을 담는다면 더 풍성한 게임 환경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게임에 이런 보편성이 있기 위해선 당연히 게임관념을 탈피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점으로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디테일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게임에 보편적 가치를 반드시 담아야 할까? 개발을 하다 보면 시간과 리소스에는 제한이 있고 명확한 우선순위가 있다. 그렇게 세세한 디테일을 담으면서까지 모두에게 공감을 일으켜야만 하는 것일까?


Credit: Orioto (https://www.deviantart.com/orioto)


보편적 가치는 감동을 일으키는 디테일이 될 수 있다


게임은 그 어느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특정 대상자를 위해 만들어진 매체이다. 이 대상자(게이머)와의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를 위해, 그리고 즐거움과 감동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다. 게임은 또한 특별한 니치 마켓을 겨냥하는 인디가 아니라면 영화처럼 최대한 많은 관객(게이머)에게 어필하려 한다. 그렇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 만한 보편적인 장치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게임에 있어서 보편성이라는 것은, 단순한 현실적인 디테일을 넘어서서, 게임과 게이머가 교류하는 부분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임은 다른 매체와는 다르게 관객 혹은 독자(게이머)가 직접 게임 속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역할 수행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참여형 매체 속에 보편적인 가치를 두게 된다면 더욱 유의미한 시도가 될 것이고, 게이머와 게임 환경 사이의 관계가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울수록 긍정적인 경험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겠다.


북미의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 레딧(Reddit)에 신들의 트라이포스에 대한 토픽이 올라온 적이 있다. 북미 RPG 팬들 사이에서는 전설적인 작품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적 추억을 떠올리며 각각의 경험을 댓글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중 추천수를 상당히 받은 댓글이 있었는데, 한 유저가 자신의 형의 플레이담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형이 처음 이 게임을 했을 때가 기억이 나네요. 형은 삼촌 집에 아주 오랜 시간 머물다가 드디어 집에 나갔죠. 형은 집에서 장구류를 찾느라 무척이나 헤맸어요. 밖엔 비가 오는데, 잠옷 입은 채로 나가기 싫어서 그랬죠.


너무나 순수한 발상이 아닌가? 링크가 방금 잠에 깨서 집 밖으로 나가서 모험을 해야 하는데, 잠옷을 입고 있어서 함부로 못 나갔다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리뷰와는 달리, 이건 우스갯소리가 아닌 누군가 신들의 트라이포스를 처음 접하면서 충분히 경험했을 만한 이야기이다. 이 게이머는 익숙한 게임관념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발상으로 게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게임을 개발하는 데 있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런 순수함에 대한 배려라고 말하고 싶다. 게이머들이 당연시 여기는 익숙함에 의지하지 않고, 다양한 발상을 최대한 배려하며 게임 환경을 구축해나간다면 기발한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창의적이고 유연한 게임이 완성될 수 있지 않을까. 잠옷을 입고 밖으로 나서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옷장을 열면 링크가 입고 나갈 옷을 준비되어 있는 센스를 발휘해보는 것은 어떨까? 게임의 일반적인 패턴에 익숙한 게이머들에게는 링크가 무슨 옷을 입던, 그냥 나가서 모험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게임이 대중을 위한 예술 매체로 발전함에 따라 익숙한 패턴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하고 순수한 발상과 접근을 수용하는 디테일도 챙긴다면 매체 자체의 예술성을 극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게임을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절대 아닌, 게임이라는 매체가 점점 게이머 역할 수행의 예술이 되어가는 요즘, 더욱더 포괄적이고, 더욱더 다채롭고, 더욱더 섬세한 표현과 동일시 효과를 줄 수 있는 게임이 개발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Credit: eric3dee (https://eric3dee.deviantart.com)


어린아이들의 게임 플레이 시간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게임 매체에 노출된 요즘 아이들은 21세가 되기 전까지 무려 10,000 시간을 게임하는데 보낸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의 기발한 발상과 일상생활에서 묻어 나오는 순수함을 때론 치사하고, 때론 게으르고, 때론 재미없는 익숙한 패턴들로 물들이는 것보다, 게임을 통해 아이의 상상력이 날개를 달고 뻗어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게임관념이라는 것은 본래 시스템적 한계가 많던 구시대 게임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관용이지, 게임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허용되지 말아야 할 성의의 부족이라고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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