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마음이 머무는 자리
1층에 있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온풍기 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자, 어깨에 눌려있던 긴장이 풀린다.
‘그래, 겨울에는 카페가 최고지.’
오늘은 두 분의 선배님과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15분쯤 걸어오니, 손과 발은 이미 얼어붙었고, 마스크 안에 고인 입김이 눈앞으로 번졌다. 코끝은 빨갛게 물들고, 주머니 속 주먹 쥔 손은 따뜻함을 찾아 허우적댔다. 그러나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몸과 마음이 풀렸다. 따스한 공기와 은은한 조명이 몸의 한기를 녹였다.
입구에는 ‘무인 주문기’가 놓여 있었다. 우리 셋은 각자 원하는 음료를 주문했다. 두 명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다른 한 명은 생강차를 골랐다. 카페는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우리는 오른쪽 공간을 선택했다. 베이지색 소파에 몸을 던지자,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목 테이블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 창가의 노란 화분, 책꽂이에 서너 권 놓인 책들은 그 자리에 생기를 더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몸이 녹는 듯, 말문이 자연스레 열렸다.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들과의 자리에는 특별한 주제가 필요 없다. 당일 있었던 소소한 일, 아이들 이야기, 오늘 날씨에 대한 짧은 감상까지, 툭툭 던지는 말들로 충분하다.
주문한 지 5분쯤 지나 음료가 나왔다. 쟁반에 담긴 잔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장난스럽게 컵을 부딪쳤다. ‘짠.’ 하는 소리는 오늘 하루를 살아낸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작은 격려이자 위로다.
“커피나 한 잔 할까?”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식사 후 늘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대방의 서사에 고개를 끄덕이고, 서로의 불편한 감정도 조금씩 녹아내린다. 험담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도, 사실은 “지금 마음이 힘드니 위로해 줘”라는 숨은 신호처럼 느껴진다.
‘무슨 저런 말을 하지?’라는 생각은 없다. 그만큼 시간은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고, 공감의 깊이를 더한다. 오늘 우리가 그랬다. 하루를 마치고, 따뜻한 시간 속에서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졸음이 몰려왔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서일까, 아니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차의 온기 덕분일까. 하루 종일 쌓인 피로가 어깨를 눌러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저 잠깐 눈 좀 붙일게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어느새 언니들의 목소리는 아득해졌다. 한 시간쯤 흐른 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 카페에서도 자더니, 오늘 또 자네.”
큰언니가 나를 보며 웃었다. 시선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디서나 언니 소리를 듣는 나이지만, 이 두 명의 선배님 앞에서는 언제나 막내다. 말없이 앉아 있거나 꾸벅꾸벅 졸아도 마음이 편하다. 자다 침이라도 흘릴까 걱정하지 않는다. 갓난아기처럼 마음 놓고 잠들 수 있는 자리. 그만큼 안락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모자를 눌러쓰고, 패딩 안에 후드티를 겹쳐 입은 내 모습은 누가 봐도 동네 아줌마 같다. 하지만 이런 모습조차 편안하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특별한지, 웃고 떠드는 시간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다시금 느낀다.
나는 4남매 중 둘째다. 위로는 오빠 한 명, 아래로는 여동생 두 명이 있다. 그래서인지 늘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언니의 존재를 원했지만, 동생밖에 생길 수 없는 현실을 몰랐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엄마에게 “언니를 낳아주세요”라며 떼를 쓰곤 했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푸념하고 조언을 듣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동성끼리라 나눌 수 있는 이야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그토록 그리웠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 언니의 존재를 포기했다.
그런데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는 걸까. 내게도 언니가 생겼다. 아이가 아팠을 때 쓴 시를 들려주자, 마치 자기 일처럼 공감해 주던 언니들. 울고 있는 내 등을 말없이 토닥여 주던 그 순간이 있었다.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을 때, 내 마음을 다독여주던 언니들. 나의 실수에도 “정말 힘들었겠다.”며 공감해 주는 그들이 곁에 있어, 그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남이 주는 위로가 뭐가 중요해? 자기 마음이 중요한 거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위로가 삶을 얼마나 단단하게 붙들어 주는지 나는 안다. 지치고 힘들 때, 곁에서 내 손을 잡아준다면 힘을 낼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 숨겨둔 마음을 털어놓는다면, 진정성을 담아 공감하고 위로한다. 마치 내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듯. 다행인 것은, 진심은 통한다는 사실이다. 관계란 이렇게 이어진다.
처음 들어섰을 때 조용하던 카페는 어느새 소란스러워졌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각자 고민과 감정을 안고 와서, 커피 한 잔과 대화 속에서 그것을 녹이고 있을 것이다. 카페 창은 온기로 가득하다. 이 안에서 느끼는 따뜻함은, 아까와는 또 다른 온도를 전한다.
‘마음을 담은 대화.’
오늘 같은 시간은 내게 생동감을 준다. 하루가 저물고, 송도 바닷가의 물소리와 짠내가 살갗에 닿는다. 감정과 에피소드로 가득했던 오늘. 이럴 때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전화를 걸었다. 은은하고 편안하게 받아주는 그 사람. 나는 대체로 먼저 연락하는 편이다. 소통하는 일에 자존심이나 망설임은 두지 않는다. 전화든 문자든, 지인이든 처음 알게 된 사람이든. 먼저 손을 내밀고 상대의 반응을 기다린다. 단, 시작은 언제나 진심이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전해지고, 상대도 나에게 마음을 연다. 설령 거리를 두더라도 받아들인다.
다행히 대부분 내 진심에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물론 내 적극성에 당황해 거리를 두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관계의 진전을 서두르지 않는다. 기다린다. 관계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으니까. 결국 그것을 풀어주는 건 ‘시간’이었다. 억지로 끌고 가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 역시 누군가 억지로 다가온다면 물러설 것이다. 그건 거부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사람이든 일이든 억지로 끌지 않는다. 느리더라도 진심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관계와 일은 결국 성공으로 이어진다.
곧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내 하루의 시작과 끝에는 늘 커피가 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사람과 감성, 추억을 담는다. 오늘도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떠올리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감사해요, 언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