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밤, 나를 안다
“커피나 한잔할까?”
아침 8시, 톡 하나가 도착했다. 누군가 나를 떠올려주는 그 마음이, 괜히 뭉클하다. 나를 기다리는 이가 있고, 내가 떠올릴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따뜻한 일이다. 그렇게 오늘의 토요일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당직 근무가 있어 새벽같이 일어났다. 쉬는 날 아침, 남편이 출근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마음 한편이 짠해지는 일이다. 그래서 나도 함께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바나나 하나, 구운 계란 두 개, 그리고 물 대신 해독주스를 꺼내어 접시에 담는다. 이런 작은 성의가 오랜 결혼생활의 언어가 되었다.
출근길에 나서는 남편의 얼굴엔 웃음이 걸려 있다. 이게 부부란다. 설명하지 않아도 닿는 마음. 자연스럽고, 담백하게 서로의 아침을 연다.
남편을 보낸 후엔, 나만의 시간이 펼쳐진다. 아직 아이들도, 반려견도 깊은 꿈 속에 있다. 이 고요한 시간을 어떻게 써볼까. 집에 머물기엔 뭔가 아깝다. 그래서 나선다.
주부에게도 ‘외출’은 특별한 휴식이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현관을 나섰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오래된 친구만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존재는 없다.
“5분 후에 집에서 출발할게.”
“그래, 잠시 후에 봐.”
톡 몇 줄로 마음이 움직이고,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음은 조급하지 않다. 15분 정도 차를 달리면 친구 집 앞에 도착한다. 친구의 남편은 그녀 대신 자동차를 수리하러 갔다고 했다. 자동차 수리. 나도 그럴 땐 늘 남편에게 부탁한다. 이럴 때, 남편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든든한지 느낀다. 아내와 남편, 참 많은 일을 함께 살아내는 동반자다.
사실, 주말이 더 바쁜 날도 많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특히 그랬다. 밀린 집안일, 세끼 식사, 아이 챙기기. 하루가 모자랐다. 이럴 땐 짜증도 나고, 괜한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런데 외출은 그 감정을 내려놓게 해 준다. 잠시나마 집을 잊게 해 주니까. 여행까지는 아니지만, 작은 탈출. ‘집을 나서는 순간’ 난 행복해진다.
“오늘은 멀리 가볼까?”
늘 집 근처에서만 만나던 친구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아이도 늦잠을 자고, 남편도 없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러자!”
친구의 경쾌한 대답에 핸들을 다대포 방향으로 돌린다.
다대포. 부산 안이지만 우리 집에서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 넓은 모래사장과 서해안을 닮은 풍경. 바위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는 아이들, 바다 내음을 품은 바람. 도착하자마자 산책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공영주차장을 지나니 울타리에 시화전이 펼쳐져 있다. 누군가의 마음이 자작시로 적혀 있고, 그 감정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10년 전, 선배들이 주말 산책을 한다고 했을 땐 “도대체 무슨 여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가 그 여유를 누리고 있다. 나이 듦이란, 이런 거다. 조금씩 마음이 느긋해지고, 시선이 넓어진다.
해변을 따라 난 산책길. 첫 구간은 40도쯤 되는 언덕이다. 그 길을 오르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정자가 하나 나온다. 우리는 그곳에 앉아, 바다를 보며 수다를 풀었다. 누군가의 눈엔 우리도 그저 ‘풍경’ 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하루를 가볍게 보듬고 있었다. 벤치에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좋다. 울타리 너머, 잔잔한 바다. 그 아래에는 수많은 생명이 살아내는 치열함이 있을 텐데, 우리 눈에 보이는 바다의 표면은 그렇게 고요하다.
‘나, 지금 잘 살고 있다고 말해줄래?’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용왕님에게 간절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순간이다.
지금 이 마음과 평온이, 오늘뿐만이 아니기를.
산책길을 마치고, 익숙한 골목의 칼국숫집으로 향했다. 다대포에 올 때마다 들르던 곳. 그곳은 여전히 따뜻했고, 테이블 너머 바다가 보였다. 주전자에 구멍을 뚫어 만든 조명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점심 전인데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술 한잔 하기 좋은 곳이네.”
“술도 안 마시면서.”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며 웃는다. 이런 시간, 이런 농담이 좋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나이 들어서야 안다.
어릴 적엔 모든 걸 쥐고 싶었다. 아이도, 일도, 사랑도, 삶도.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욕심을 낸다고 다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고, 그저 주어지는 복도 있다. 그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서 지금은 마음이 한결 가볍다. 아이들에게도 과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예전엔 “내 아이는 뭐든 잘할 거야”라는 오만한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안다. 그 욕심이 결국 나를 힘들게 했다는 것을.
이제 나는 매일, 조용히 다짐한다.
‘욕심을 버리자.’
‘내 몫은 따로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내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간다.
무던하고, 가볍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