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니까

2부. 밤, 나를 안다

by 윰글

요즘은 ‘바깥나들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계절이다. 차를 타고 조금만 나서도 벚꽃이 만개해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서로의 거리를 조금씩 좁힌다. 평소에는 집 안에서 어색해 나누지 못하던 말도 오가고, 눈빛을 주고받는다. 부부라면 더 그럴 것이다. 봄날, 벚꽃길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마음은 어디로 갈까.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점점 희미해진다. 표현을 줄이고, 잘하던 애정 표현조차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라는 너스레로 감춘다. 작은 표현 하나가 큰 감동을 줄 수 있는데, 나는 왜 여전히 망설이는 걸까.

봄기운에 이끌려 용기를 낸다. 아이는 엄마에게, 엄마는 다시 그 아이에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정함을 건넨다. 눈빛에서 감정을 읽고, 그에 대한 화답을 주고받는다. 바쁘다는 이유로 묻혀 있던 사랑의 감정을, 봄날의 공기 속에서 다시 꺼내본다. 그렇게 되살아난 온기로 다음 해 봄까지 버티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봄이니까.’

특별한 날에만 마음을 전하려는 우매함을 내려놓으라고, 봄이 조용히 속삭이는 듯하다.

‘충분히 그래도 돼요.’

멀리 갈 것도 없다. 흩날리는 꽃잎 아래에서 남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다정하게 걸어보자.”

그러면 남편은 짧게 웃으며 대답한다.

“좋아”

이 정도의 대답이 나올 만큼, 우리는 꽤 괜찮은 부부 아닐까. 일상 속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이고, 잊고 지낸 감정을 다시 불러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봄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아침, 꽃을 보기 위해 차로 20분쯤 달려 광안리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만 해도 벚꽃이 만개한 풍경이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도착하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라톤 대회였다. 같은 색 티셔츠를 입은 수백 명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저마다의 속도로 출발선을 넘는 사람들. 평소 조용하던 거리가 그들의 발걸음과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얼마 전 읽은 러너 작가의 책이 떠올랐다.

‘저 사람들은 지금 어떤 풍경을 마음에 그릴까.’

남편에게 부탁해 그들의 달리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러닝은 신체뿐 아니라 마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한다. 나도 요즘 조금씩 달리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저들처럼 달릴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그러나 오늘의 일정은 달라졌다. 꽃길이 막혔다. 인생이 늘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주어진 상황에 맞게 방향을 바꾸면 그만이다.


우리는 광안리를 벗어나 차로 20분을 더 달려 해운대에 도착했다. 벚꽃 구경은 잠시 미루고, 대신 카페를 찾았다. 골목 2층에 있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계단을 오르자 커피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근처에 사는 선배 언니에게 미리 연락을 해두었는데, 10분 후 도착했다. 남편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걸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각자의 자리를 잡고,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창가에 앉아 내려다보니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아이 손을 잡고 걷는 엄마, 길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나누는 연인들. 헤드폰을 낀 채 바쁘게 걸어가는 직장인, 꽃다발을 든 청년도 있었다. 그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평소에는 바다가 먼저 보였는데, 오늘은 길가의 벚꽃이 나를 끌어당겼다.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에 반짝이며, 사람들의 발걸음 사이로 춤추는 꽃잎들. 그 모습이 봄의 진짜 얼굴 같았다.

생각해보면 지난 1년 동안 남편과 주말 데이트를 한 적이 많지 않았다. 같은 집에 살지만, 평일엔 각자의 일상에 묻혀 대화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주말에는 조금 다른 리듬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본다. 아이들 이야기, 부모님의 건강, 앞으로의 계획. 때로는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평화로웠다. 게다가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 덕분에 기분도 좋았다.

‘벚꽃 사진 10장 찍기’

오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꽃길이 막혀서 무산되었다. 대신 해운대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자기야, 여기 꽃이 더 예쁜데?”

“와, 그러네. 여기서 찍자.”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입구 근처, 활짝 핀 벚꽃 앞에서 사진을 남겼다. 마치 숨겨둔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화질은 조금 아쉬웠지만, 오늘의 행복을 담기엔 충분했다.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바꾸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참 괜찮았다.’

봄. 생각만으로도 설레고, 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번진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계절, 작은 설렘조차 크게 다가온다. 햇살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치고,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 때, 온몸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 그 안에서 피어나는 기대감은 마음속에 불을 지핀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의 거리를 좁혀본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의 웃음소리, 작은 손짓,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흔들린다.

‘내 판단이 맞을까?’

‘이 선택이 옳을까?’

확신이 서지 않을 땐, 가까운 지인이나 남편에게 묻는다. 남편은 언제나 내 말을 응원해주는 조력자다. 그게 늘 고맙다. 그의 믿음 덕분에 나는 다시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나도 남편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대화가 많아지는 계절, 봄. 겨울의 차가움이 사라지고, 햇살과 바람 속에서 마음이 열리는 계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천천히 좁혀주는 시간. 오늘도 나는 그 따뜻한 리듬에 맞춰 걷는다. 눈에 보이는 벚꽃, 손끝에 스치는 바람, 그리고 나누는 말 한마디 속에서 삶의 여유와 행복을 느낀다.

하루가 저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 속에서도 봄의 잔향이 마음을 감싼다. 하얗게 날리는 꽃잎이 뺨을 스치면, 눈을 감고 그 향을 깊게 들이마신다.

봄은, 눈에 보이는 풍경과 손끝의 감각, 그리고 마음속 따스함까지, 일상의 모든 순간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든다.


‘오늘은 누구를 만날까.’

폰을 꺼내 연락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린다. 생각보다 많은 이름이 스쳐 간다. 참 고마운 일이다. 내 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봄날의 햇살처럼 마음을 환하게 비춘다.


겨울보다 봄이 좋다. 누군가와 가까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어디서 구한 꽃 몇 송이도 자연스럽다. 부모님도 좋고, 친구도 좋다. 혹시 마음이 멀어진 사람이 있다면, 이 봄날에 한 번쯤 연락해보면 어떨까.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다.


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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