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밤, 나를 안다
직원들과의 저녁 회식이 있는 날이다. 명예퇴직을 하시는 선배님 한 분이 저녁을 내기로 하셨다.
“이제 나도 학교를 떠나야지.”
평소 하시던 말씀이었지만, 막상 올해로 다가오니 기분이 묘했다. 나와는 2년 동안 동학년으로 지낸 분이다. 40년 가까이 교직에 계시다가 퇴직하시면 어떤 마음일까. 매일을 아이들과 즐겁게 지내는 모습이 후배들에게는 모범이 되는 분이다.
“그동안 고마웠다.”
세월을 같이 한다는 건, 소중한 일이다.
오늘의 회식 장소는 홍어집이다. 이 집은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 위치한다. 볼일이 있을 때 지나다니던 곳이라 익숙하지만, 정작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주차를 하고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출입문을 열자, 코끝을 찌르는 강한 홍어 향이 느껴졌다. 나는 그 냄새가 낯설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는 그 냄새가 그리워진다. 이래서 홍어에는 마니아가 있는 모양이다.
홍어는 먹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먹어봐야지 생각만 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호불호가 갈린다.'
'삭힌 정도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다.'
이런 표현들을 들어서 쉽게 도전하기 힘든 메뉴였다. 그래서 직접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홍어를 기다렸다. 동그란 접시 위에 분홍빛 홍어 조각이 얇게 썰려 있었고, 그 옆에는 따뜻한 돼지고기 수육과 마늘, 고추, 다진 양념이 놓여 있었다. 보기에는 일단 예뻤다. 하지만 막상 젓가락을 들려니 망설여졌다.
"한번 먹어봐. 냄새는 처음에만 강해."
선배의 웃음 섞인 말에 용기를 냈다. 한 젓가락 홍어 조각을 입안에 넣는 순간, 코로 올라오는 강한 향이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 짧은 거부감이 지나자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쫄깃한 식감 뒤에 은근히 감도는 단맛,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고소함.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았다. 홍어가 발효되면서 만들어낸 복합적인 향미가, 마치 한 사람의 인생처럼 여러 겹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홍어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서사였다. 발효 과정에서 생긴 강렬한 향은 단지 부패가 아니라 '숙성의 증거'였다. 시간이 머문 흔적이기도 하다. 사랑도 그렇다. 처음엔 거칠고 낯설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안에서 묘한 부드러움이 생긴다. 관계가 익어가는 과정에는 냄새와 온도가 있다.
홍어와 묵은지, 그리고 삼겹살 한 점을 함께 먹자, 그 조합이 입안에서 하나의 맛을 만들었다. 서로 전혀 다른 재료가 만나 어우러지는 순간이다. 문득 떠올랐다.
‘사랑도 이런 게 아닐까’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부딪히고, 익숙해지고, 마침내 하나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것. 그 안에는 수많은 조율과 인내, 그리고 기다림이 있다. 그래서 홍어와 사랑을 비교해 본다.
홍어와 사랑은 닮은 점이 있다.
첫째, 시간이 지나야 진짜 맛이 난다. 홍어가 숙성되며 감칠맛을 더하듯, 사랑도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깊어진다. 처음의 설렘은 금세 사라지지만,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다.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그 맛이 진짜다.
둘째, 처음엔 낯설고 어렵다. 홍어의 강한 냄새처럼 사랑도 처음엔 두렵고 혼란스럽다. 그러나 그 낯섦을 견디면, 그 뒤에 오는 감정은 의외로 따뜻하다. 그래서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힘들다.
셋째,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금세 상한다. 홍어는 온도와 습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고, 사랑은 배려와 존중이 없으면 쉽게 변질된다. 관계의 온도를 지키는 건 결국 서로를 향한 꾸준한 관심이다.
그렇다면 홍어와 사랑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첫째, 홍어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진심과 시간, 그리고 마음으로만 쌓이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둘째, 홍어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먹을 수 없게 되지만, 사랑은 끝까지 존재할 수 있다. 시간이 사랑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사랑은 그 시간을 통째로 품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은 또 다른 가정을 만들어간다.
홍어 한 점을 다시 젓가락으로 집었다. 이번엔 묵은지와 돼지 수육을 함께 곁들였다. 그 조화로운 맛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홍어를 두려워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홍어의 매운 향, 묵은지의 새콤함, 수육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지니 모든 맛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있었다.
사랑도 그렇다. 서로 다른 기질, 다른 삶이 만나 부딪히고 깎여나가며 비로소 하나의 온도가 된다. 완벽해서 좋은 게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며 함께 맞춰가는 과정이 깊은 맛을 만든다. 완벽한 사랑도 사람도 없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맞춰가는 과정이 사랑의 한 형태다.
사랑은 결국 '익숙함 속의 새로움'을 배우는 일이다. 같은 사람의 눈빛에서도 매일 다른 감정을 읽고, 같은 대화 속에서도 매번 새로움을 느낀다. 하루의 끝, 지친 몸으로 마주 앉아 조용히 웃는 순간조차 사랑은 다시 피어난다. 사랑이란 어쩌면 '다시'의 연속이다. 다시 시작하고, 다시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는 것. 상대방의 부족함을 알더라도 나의 충분함으로 채우는 일. 사랑도 퍼즐 게임 같다.
홍어의 매운 향이 천천히 익숙해질 때쯤, 나는 생각했다. 다행인 것은 사랑이 모두에게 같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사랑을 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사랑을 표현한다. 표현하는 방식, 정도, 온도가 다르다. 또한 상대방 내면 속에서 내 사랑이 숙성된다. 그것은 어떤 발효 음식보다 진한 향을 남긴다. 죽음도 그 사랑을 뺏을 수 없을 만큼.
처음엔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던 홍어를 회식이 끝날 때쯤에는 제법 음미하게 되었다. 입안에 남은 여운을 곱씹으며 웃음이 났다. 사랑도 그렇다. 낯설고 강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내 안에 스며든다. 도려내려 해도 그러지 못하고, 받아들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향을 내 안에 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그 향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바로 '함께 살아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 내 마음 어딘가에도 오래 삭힌 사랑의 냄새가 번졌다. 그건 불쾌한 향이 아니라, 오래된 그리움과 따뜻함이 섞인 향이었다. 마치 송도의 바닷바람처럼, 낯설지만 익숙하고, 차갑지만 묘하게 따뜻한. 그 향 속에서 나는 아주 천천히 내 사랑을 음미했다.
그리고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