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통해 배운 위로
'망했다' 여기는 순간에도
삶은 여전히 '그려지고' 있다.
어릴 적부터 나에게 그림은 아쉬움이었다.
우리 집이 부자였더라면 그림을 계속 시켰을 엄마의 말을 들었을 때문일까,
아니면 잘 그렸던 그 시절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왜인지 그림은 계속 그리고 싶으면서도 쉽게 배울 수 없었다.
2년 전쯤, 짧은 시간 그림을 배우려 한 적이 있었다.
기초 소묘 수준이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터라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 저 망한 거 같아요"
내 그림을 보시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 한마디에 힘을 얻어 다시 연필을 잡았다.
'망했다, 다시 하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내 그림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얼마나 과감하지 못한 사람인지.
선 하난 긋는 것 주저하고, 색 하나 칠하는 데도 망설이는 사람.
그런데 동시에, 선생님도 놀랄 만큼 곱게 선을 쌓는 사람이었다.
조심스럽지만 섬세하게 천천히 쌓아 올리는 그 두 얼굴이 나란히 있었다.
늘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만, 못할까 봐 두려워서 피해왔다.
그런 나에게 짧았던 그 시간은 정말 잘한 선택 중 하나였다.
그림 덕분에 망치는 것도 과정이라는 것,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판단하기보다 계속하기를 택하라는 것을 배웠다.
여러 이유로 지금은 배우고 있지 않지만,
유독 그때 선생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선명하다.
언젠가는 다시 시작하게 되리라 믿는다.
그때 그렸던 초록색 원기둥은 기초 중에 기초였다.
누구나 그리는 별것 아닌 쉬운 그림이었지만 나에겐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다.
나는 초록색을 좋아한다.
새싹의 초록, 이파리의 초록,
봄의 초록, 여름의 초록, 나무의 초록,
그 색으로 원기둥을 그리는 동안. 나는 결국 평온했다.
물론 결과는 생각했던 초록색과 달랐지만 그 또한 그대로 괜찮았다.
내가 그린 초록에게 내가 위로받았듯, 닿을 수 있다면,
모두가 좋아하는 가장 간단한 것에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나의 실패를 곱씹다가 글을 쓴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다.
다만 그 일을 판단하는 사람의 해석과 감정만 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내 그림을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이 올지 안 올진 모르지만,
얼룩투성이라도 연필을 계속 쥘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림이 그랬듯, 우리의 인생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