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내려놓는 순간에 대하여

나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질문

by 감격

"나는 누구일까?"


이 질문은 언제 들어도 묘한 멈춤을 선사한다.

마치 오래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을 때처럼,

가슴 한구석에서 조용한 울림이 생긴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역할을 지나왔다.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부모로,

어떤 팀의 일원으로, 어떤 관계의 상대자로,

이 역할들을 모두 합친 것이 '나'라고 믿어왔지만,

그 많은 이름들 속에서 정작 나는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궁금해졌다.


우리는 '나'를 지키려고 애쓴다.

성격, 이미지, 책임감, 기대, 기준...

마치 그것이 무너지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것처럼

더 꽉 쥐고, 더 굳게 버티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삶은 더 무거워진다.

나는 애쓰며 지키고 있는데 '나'는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는 습관이 있는 나,

여느 때처럼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 굳은 표정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그 얼굴과 표정은 피곤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잃고도 계속 버티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들여다보니 나는 지금 '나'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기대하는 '나'를 유지하느라

하루하루를 소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힘들어지는 진짜 이유는

상황이 버거워서만은 아니다.

많은 경우

'나라는 감각'을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 커서

움직이지도, 숨 쉬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감각을 살짝 내려놓는 순간이 온다.

언제일지 모르는 그 순간.

아이가 던진 한마디 일 수 있고,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일 수도 있고,

스쳐 지나간 내 모습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아주 작은 틈에서 이해할 수 없는 변화는 생긴다.


감정이 선명해지고,

'해야 하는 나'와 '살고 싶은 나'가 분리되면서

무겁던 한 걸음이 생각보다 가벼워진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쥐고 있던 '나라는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짜 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제야 삶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어긋났던 리듬이 맞춰지고 흐릿했던 마음이 조금 또렷해지고

내 안에 감춰있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오늘도 묻는다.

"나는 누구일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 질문은 동시에 나를 깨어나게 한다.

흔들리지 않는 가장 나다운 나로.


어쩌면 인생은, 무언가를 더 붙잡는 순간이 아니라

조용히 내려놓는 순간부터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나'라는 이름을 잠시 내려놓아 보면

그 빈자리에 뜻밖에도 가장 나다운 내가 서 있다.

오늘 나는 그 자리로 천천히 돌아가보려고 한다.


붙잡기보다 느슨해지고, 지키기보다 바라보면서.

그렇게 조금씩 내 삶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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