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프사이클> 초단편소설집 프로젝트
“다은씨, 김다은씨 이제 일어나셔야죠. 자, 눈을 뜨고 저를 보세요.”
오랫동안 얼어있던 다은의 몸에 조금씩 온기가 감돌았다. 심장을 출발한 피의 온기가 발끝, 손끝 그리고 눈꺼풀에까지 다다랐다. 수십 년 만에 열려진 다은의 눈꺼풀. 쏟아지는 불빛 사이로 다섯 명의 사람이 보였다.
“어, 여, 여기가 어디죠?”
“다행이네요. 바이털도 모두 정상이고 의식도 다 돌아왔네요. 한동안 머리가 좀 멍하기는 할 겁니다. 기억이 잘 안 나실 수 있겠지만, 다은씨는 2025년에 백혈병 말기 판정을 받고 동면(冬眠) 상태로 그동안 지내셨어요.”
2025년, 백혈병, 동면, 잠들어있던 수많은 기억이 다은의 머릿속에서 일시에 깨어나고 있었다.
“백혈병을 완벽하게 치료하는 약품이 개발되고, 또 동면 상태에 있던 환자를 안전하게 회생시키는 기술이 상용화되어서 이렇게 다은씨를 다시 깨웠습니다. 조금 전에 백혈병 치료 약품도 투입했으니 이제 아무 걱정 없이 건강하게 다시 살아가시면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다은씨.”
“혈색이 돌아오니 더욱더 예쁘시네요. 와, 신기하다!”
“그러게요. 실제 사람 모습을 이렇게 보는 게 정말 신기하네요.”
다은의 침상 곁에 서 있는 이들, 백색 가운을 입고 있는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건넸다. 다은은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무언가 몹시 이상했다. 다은의 눈에 들어온 그들의 모습은 핑크빛 피부에 모두가 똑같은 얼굴이었다.
“놀라셨을 겁니다. 잠시 후에 레슬리가 설명해줄 테니, 일단 한숨 주무세요.”
두어 시간이 흐르고 다은은 다시 눈을 떴다. 가슴에 레슬리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이가 침대 곁에 앉아있었다.
“다은씨, 지금부터 제 얘기 잘 들으세요. 많이 혼란스럽겠지만, 뭐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닐 겁니다.”
동면에서 깨어난 세상은 많이 변해있었다. 오존층 파괴로 인해 쏟아지는 태양 방사선, 녹아버린 영구동토층에서 깨어난 고대 바이러스를 피해 모든 인간은 지하 시설에 각자 분리되어 격리된 채 숨어 지내게 되었다. 지하에 숨은 인간을 대신해서 각자가 조정하는 아바타들이 지상의 삶을 대신 사는 세상. 다은이 만났던 핑크빛의 다섯은 모두 누군가의 아바타들이었다.
“레슬리씨, 그런데 왜 모두의 아바타가 같은 모습인거죠? 가슴에 차고 있는 명찰, 입고 있는 옷이나 액세서리 정도 말고는 모두 같은 모습, 얼굴인데요.”
“차별 없는 세상, 완전히 평등한 세상을 위해 아바타를 그렇게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꽤 오래전의 일이죠. 성별, 인종, 나이를 알 수 없도록 모두 핑크빛 피부에 똑같은 키,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언어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면, 상대방에게는 듣는 이의 모국으로 변환되어서 들리는 식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국적도 모릅니다. 저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성별, 나이, 국적, 인종 등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 어떻게 그런...”
“다은씨도 며칠만 여기 머문 후에 다은씨에게 배정된 지하 벙커 하우스로 이동하실 겁니다. 그런 후에는 아바타가 배정되고요. 아, 이제 다은이라는 이름을 쓰실 수는 없습니다. 성별을 추측하기 어려운 이름으로 개명하셔야 합니다. 아바타 조종하시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
다은은 레슬리의 설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온몸이 침대 속으로 녹아들 듯이 다시 잠이 들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곁에 다른 이가 앉아있었다. 처음에 다은을 깨웠던 피닉스였다. 그는 다은에게 작은 안경을 건네주었다.
“다은씨 부모님께서 다은씨 앞으로 남겨준 유산이 어마어마하네요. 그분들이 투자하셨던 자산이 다은씨가 동면하는 동안 수십 배로 불어났네요. 그래서 혹시 이 특수 안경을 사실 생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게 어떤 안경이죠?”
“일단 그 안경은 불법입니다. 다만 걸릴 일은 전혀 없습니다. 부유층들중에 그 안경 쓰는 이들이 적잖거든요. 그 안경을 아바타가 쓰고 있으면 상대방 아바타의 성별, 나이, 국적, 인종 등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아바타의 학력, 재산, 종교, 직업까지 바로 게임 속 상태 바(bar) 형태로 뜹니다. 다은씨가 만나는 아바타, 아니 그 아바타를 조정하는 이들이 누군지 모르면 좀 그렇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데 이 안경을 쓰고 있으면 바로 다 알 수 있어요. 저도 이 안경을 갖고 싶기는 한데, 저는 그 만큼의 돈은 없거든요. 대신 다은씨가 이 안경을 구매하시면 제가 커미션을 좀 받을 수는 있죠.”
“다른 아바타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나는 다른 아바타들이 누구인지 알게 된단 거죠?”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이해가 빠르시네요. 어떻게, 구매하실래요? 떠나시기 전에 결정하셔야 해요.”
다은은 다시 깊은 꿈속에 빠져들었다. 동면에 들기 전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친구 여럿과 카페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모두 핑크빛의 같은 얼굴이었다. 핑크빛 아바타가 없던 세상, 그 시절 다은에게 친구들은 이미 핑크빛 아바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