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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국퀴어 May 23. 2022

강원도에서 연애는 안 했습니다

정한새



    

오랫동안 인터넷 커뮤니티를 떠돌면서 ‘구인’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 한창 성적으로 왕성할 때에 어떻게든 괜찮은 사람 좀 만나보겠다고 온라인 발품을 팔았더랬다. 주로 다음 카페에서 사람을 찾아다녔고, 물론 내가 글을 올린 적도 있다. 이것도 벌써 nn년 전 일이라(그 뒤로 안 한 건 아닌데 나이 들면서 뜨문뜨문해졌다) 지금은 다음 카페보다는 어플이나 다른 방식으로 만남을 추진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틴더를 위시로 여러 데이트 어플이 많이 생겨 어지간한 사람이 다 알겠지만, 이런 류의 비대면 첫 만남은 무엇보다 글이 중요하다. 요새는 사진으로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방법도 많이 쓰는데, 아무래도 이때는 아웃팅 문제 때문에 사진을 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시판에 글을 써서 사람을 끌어들여야 했으므로 어떤 제목을 다느냐가 그 글의 조회수를 좌우했다. ‘[부치to팸] 같이 걸어요’ 같은 선고백 후만남 식 제목부터 ‘좋은 사람 있으면 만나러 갈게요’처럼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고, ‘대구경북/일반st/20대/흡연x, 술o’ 같은 자기소개까지, 다양한 변주가 매일 게시판을 채웠다. 제목에 혹하면 들어가서 글을 보고 연락을 할지 말지를 결정했다. 제목에서 확 끌렸는데 내용은 그저 그런 경우도 있었고, 제목은 평범해서 들어갔더니 생각보다 글이 아름다운 경우도 있었다.

자주 글을 읽다 보면 글 올리는 사람의 유형도 알 수 있었다. 같은 글을 연달아 올리는 사람도 있었고, 닉네임을 주기적으로 바꿔가며 올리는 사람, 매번 정성스럽게 새 글을 쓰는 사람, 아마도 누군가와의 만남이 잘 안 이루어진 것 같을 때 글을 올리는 사람 등 여러 사람이 모니터 안에서 오갔다. 그렇게 틈날 때마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들여다보고 마음에 드는 글을 만나면 댓글을 남기거나 쪽지를 보내곤 했다. 여러 번 하다 보면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영영 답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글 쓴 사람이 강원도 사람인지 아닌지를 꼭 확인하곤 했다. 되도록 만나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초기에는 당연히 나도 가까이 사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야 서로 시간 부담이 덜하고, 만날 곳을 잡기도 편하고, 혹시나 서로 마음에 들어서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지면 다음을 기약하기도 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고개를 들어 사방을 바라보니 강원도 퀴어 사람이라는 게 참으로 거기서 거기였다. 일단 스스로 정체화한 퀴어도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정체화한 퀴어가 누구 좀 만나겠다고 고개를 내미는 경우는 더 적었다. 그러다보니 자칫하다간 내 (퀴어) 친구의 친구거나 구 애인이거나 (퀴어) 친구의 친구가 예전에 만날 뻔 했던 사람이거나 이렇거나 저렇거나 그렇고 그렇거나 아무튼 다 거기서 거기였다. 안 그래도 XX광장 걷다가 아빠 친구랑 인사하는 날이 드문 게 아닌데 길 걷다가 내 애인의 구 애인과 마주칠 지도 모르는 경험까지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수도권 사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잘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당시의 나는, 어차피 퀴어는 공개적인 데이트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거리 연애도 괜찮았다. 좀 극단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어렸으니까 봐주자) 어차피 길에서 손도 못 잡고 뽀뽀도 못 할 거, 만남이 그리 중요한가? 자주 만나지 못해도 자주 연락하면 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우리의 첫 만남도 모니터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억 안 나나요...?


물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만나고 싶어 했고 그러다보니 수도권 사람에게 내 주소지는 큰 걸림돌이었다. 나는 서울 정도야 언제든 오갈 수 있는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아니었고, 나는 못 만나면 자주 문자와 전화 통화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만남 그 자체를 원했다. 그렇다고 수도권에 사는 사람이 강원도에 오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서울 사람이 경기도 사람을 만나는 거나, 서울 사람이 강원도 사람을 만나는 거나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자차가 없는 이상 이동 시간은 비슷했다. 편도 한 시간 반 정도는 감수할 마음을 먹고 연애시장에 나왔다면! 솔직히 서울특별시 중랑구에서 경기도 안성시 가는 거나 강원도 원주시 오는 거나 별 차이 없거든요! 아니지, 원주시 오는 게 더 빠를 걸?!?!!! 그런데도 강원도라는 단어만 들으면 탈반이라는 단어를 들은 것마냥 쇽쇽 피해가던 당신들이여... 이런 일이 한 번, 두 번, 세 번 겹쳐지다 보니 그럼 뭐 어쩌자는 걸까, 하는 마음이 생겨버렸고 이렇게 자세가 삐딱해지는데 연애가 잘 진행될 리가 있나요.

그렇게 해서 만났다가 헤어진 사람도 혹시 서울 어드메에서 만나진 않으려나 벌벌 떨어야 했으니 말 다 했다. 한동안 신촌 모 공원(레즈 스팟이라고 불리곤 했던 거기 맞습니다)에서 친구(역시 퀴어) 만날 일이 있거나 퀴어문화축제에 가면 구여친이라도 볼까봐 불안했던 나날이여. 지금은 더 이상 커뮤니티에서 애인을 찾지 않는데도 가끔씩 네가 아는 그 애가 알고 보니 내 구여친의 후배의 친구더라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이러니 내가 어떻게 강원도에서 연애할 수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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